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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구 기념관 지역에 서 있는 전봉준 동상. 1987년 김경승이란 사람이 제작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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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합지졸일 수밖에 없는 농민군의 진영은 예상보다 빨리 정비되었다.

대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까닭에 모든 사람이 솔선수범하였기 때문이다. 지휘본부에는 <동도대장>이란 대장기에 '보국안민(輔國安民)'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하늘 높이 게양되었다. 그리고 각지에 다시 격문을 보내어 참여를 호소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의 본의가 단연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方伯) 수령(守領)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갑오 정월 일
                                                         호남창의대장소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동학혁명 백산창의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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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을 띄운 지 며칠이 지나자 호남 일대의 동학교도와 일반 농민들이 거사를 지지하며 구름처럼 몰려왔다. 동학의 포가 있는 지역은 각자 지역별로 기포(起包)하여 소속 창의대장소로 모여들었다.

고부 백산을 중심한 인근 각 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광ㆍ옥구ㆍ만경ㆍ무안ㆍ임실ㆍ남원ㆍ순창ㆍ진안ㆍ장수ㆍ무주ㆍ부안ㆍ장흥ㆍ담양ㆍ창평ㆍ장성ㆍ능주ㆍ광주ㆍ나주ㆍ보성ㆍ영암ㆍ해남ㆍ곡성ㆍ구례ㆍ순천ㆍ전주 등지의 교도가 거의 때를 같이해서 일어났다.

모여드는 군중은 비단 교도들뿐이 아니었다. 관의 행패와 양반, 토호들의 극악한 착취에 원한이 골수에까지 사무친 백성들이 동학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인 백성들은 지역별로 동학의 포와 접의 조직에 흡수되어 군장의 지휘아래 교도와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아침나절에 팔십여 명밖에 안 되던 포에서도 저녁 때이면 그 인원이 이백 명, 혹은 삼백 명으로 늘어났다.

식량의 조달은 관아의 창고에 쌓여있는 세미(稅米)를 가지고 넉넉히 충당할 수 있었지만, 인원이 늘면 느는 대로 곧장 군막을 새로 쳐야 했다. 무장 일대는 밤늦도록 군막을 치는 망치소리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 밤이면 군데군데 화톳불이 찬란했다.
대장소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하여 그 지도부가 둘러앉아 전략을 짜기에 밤낮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군사를 조련했다. 총질에 익숙한 사람은 특별히 선발되어 군기고에서 탈취한 화승총으로 장비를 갖추고 총질하는 연습을 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대를 베어다가 죽창을 만든다, 궁장이는 활을 메운다, 화살을 다듬는다, 쉴 틈이 없었다.
지도부는 2월 20일경 다시 각 읍에 격문을 띄워 거사를 하게 된 뜻을 밝히고 거사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백성을 지키고 길러야 할 지방관은 치민의 도를 모르고 자신의 직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하여 전운영이 창설됨으로써 많은 폐단이 번극하니 민인들이 도탄에 빠졌고 나라가 위태롭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다. 원컨대 각 읍의 여러 군자는 한목소리로 의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주석 2)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 권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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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기포(起包) 장소가 무장인가, 백산인가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논란이 일었다. 과거에는 백산설이 정설처럼 굳어졌는데 근래에는 무장설이 더 공감을 받고 있는 편이다.

1차 기포의 장소가 무장이라는 논거로서는 ①<전봉준공초 초초(初招)>, ② '전봉준 판결선고서'에 무장에서 기포했다는 기록, ③<취어(聚語)>에 실린 '무장동학배포고문', ④<오하기문(梧下記聞)>, P.72의 기록, ⑤<수록(隨錄)>의 일지, ⑥박문규의 <석남역사소설 - 박씨정기역사>, P.10 (이 필사본은 『한국학보(71)』부록, 일지사, 1993), ⑦김방선의 <임하유고(林下遺稿)>의 기록이 제시되고 있다. (박맹수, <사료로 읽는 동학농민혁명(11) : 전라도 무장현의 동학농민군 전면기포에 대하여>, ≪문화저널(60)≫1993년 5월호, 전주 : 전북문화저널사, PP.27~29 참조)
 
동학혁명모의탑
 동학혁명모의탑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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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한 연구가는 여섯 가지 이유와 사례를 들어 백산기포설을 주장한다.

1. 동학농민군의 집결지는 부안 · 고부 · 태인 등지에도 있었다. 따라서 무장의 집결은 전체의 일부라고 볼 수밖에 없다.

2. 전봉준의 공초 275개 문항 가운데 '고부기포'란 표현은 있으나 무장기포라는 표현은 없다.

3. 백산(白山)에서 각 지역의 농민군들이 모여 비로소 동학농민군으로서의 대오를 결성했으니 이곳을 기포지(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농민군의 진압에 나선 관군이 고부로 출동했다는 점이다. 만일 기포지가 무장이었다면 관군이 무장으로 출동했을 것이다.

5. 전봉준은 왜 무장에 머물렀던가. 원래 전봉준은 접주일 뿐 포(包)를 거느리지 못했다. 공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학의 교(敎)를 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접주로서의 조직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손화중포를 거느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손화중포는 도내에서 가장 거포(巨包)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6. 무장의 동학농민군과 고부의 동학농민군이 백산에서 연합부대를 형성했다는 일부의 설은 봉기지 (발상지)가 두 군데였다는 이야기이다. (주석 3)

 
동학정에서 백산면 소재지 쪽으로 바라본 풍경.
 동학정에서 백산면 소재지 쪽으로 바라본 풍경.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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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교수는 「갑오농민전쟁의 1차 농민전쟁」에서 무장 기의설을 제기하고, 신복룡 교수는 『전봉준평전』에서, 이이화는「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1)」에서 각각 무장기포설을 주장한다.

최초로 동학농민봉기를 연구하여 학문적으로 접근한 한우근 교수는 『동학과 농민봉기』에서, 우윤 교수는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백산기포설을 주장하고, 최현식 선생은 『갑오동학혁명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백산기포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연구된 자료와 증언을 종합하면, 무장에서 제1차 기포가 있었다가 곧 백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도부가 무장의 당산마을 앞 들판을 제1차 기포 장소로 택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 무장 대접주 손화중의 포가 그 규모면에서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당시 그가 거느리고있는 군대는 3천 명에 이르렀으며, 이미 1년 전의 보은취회 때 손화중은 독자적으로 호남의 동학도를 모았던 금구취당의 두목이었다. 따라서 무장에 도소를 설치하면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대규모 동학조직의 세력을 도소의 휘하에 둘 수 있었다.

2. 전봉준과 손화중의 절친한 친분과 동지적 결합관계 때문이었다.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6년 연하였고 전봉준이 학식과 지략의 면에서 탁월했기 때문에 손화중은 대접주이면서도 전봉준을 자기의 윗자리에 받아들였다.

3. 무장이 지리적으로 고부에 비교적 가까운 동학조직의 거점이었다. (주석 4)


주석
2> 이복영, 『남유수록(南遊隨錄)』, 갑오 2월 20일.
3> 최현식, 앞의 책, 61~62쪽.
4> 신용하, 「고부민란의 사발통문」,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143~144쪽, 일조각.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손화중,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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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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