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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으로 분장한 학생들이 관작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동학농민군으로 분장한 학생들이 관작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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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과 관군 중 어느 쪽이 선공한 것인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다음은 관군이 선공했다는 기록이다.

전라중군 김달관, 초관 이재섭은 민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좌익으로 10리 지점에 진을 쳤고 초관 유영호는 보부상대 천여 명을 이끌고 백산의 뒤편 30리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달관ㆍ이재섭이 공을 세우려고 상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앞을 다투어 산으로 쳐 올라갔으나 적의 세력을 당하지 못하여 대패하고 도망치니 유영호 부하도 도망치고 한 사람도 없었다.

별장 이경호는 이를 보고 결사일전을 각오하였으나, 향관(군량담당관) 김명수(금구현감)는 애초에 별장의 자리에 특용해주지 않은 불평으로 군량운반도 제대로 하지 않아 무남병(武南兵) 700인과 토병 560명이 여러 날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병들의 형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연일 비가 내려 기한에 떨고 있었다.

4월 7일 새벽, 별장 이경호는 칼을 휘둘러 호령하니 영병의 사기가 비로소 떨쳐 백산을 쳐올라갔으나 화살과 탄환이 비 오듯하여 앞에서 쓰러지니 뒤에서는 도망치는 것이었다.

좌우를 돌아보니 서기 유상문과 관노 김암회 두 사람 뿐이었다. 이경호는 적군 7인을 베고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유상문이 역시 전사하고 김암회는 시체를 걸머지고 도망쳤다. 관의 대소를 막론하고 나라에 몸을 바치는 절개야말로 어찌 장하지 않으랴 - 다만 대사를 그르친 사람은 2, 3인(김달관 · 이재섭 · 김명수) 이었다. (백산은 황토현의 착오임) (주석 10)

 
동학농민군. 고등학교 <한국사>에 수록된 그림.
 동학농민군. 고등학교 <한국사>에 수록된 그림.
ⓒ 삼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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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동학군이 먼저 공격했다는 자료이다.

고부에 이르러 백산위에 진을 치고 해가 저물어 바야흐로 저녁밥을 먹는데 군율이 없이 흩어져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동학군들이 쳐들어 왔다. 관군과 보부상대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도망치니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영관(右領官) 이곤양(이경호)이 죽고 나머지는 각자 도망치고 말았다. (주석 11)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8일 정부에 올린 황토현 전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당초 신영(新營 · 무남영) 병정과 각 고을 포군을 요처에 배치하여 경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그런데 저들 양당(태인에 집합했던 부대와 부안에 집결했던 부대)이 한 곳으로 (도교산) 모이니 그들 모임이 비록 오합지졸 같으나 그 세가 왕성했다. 어제 인시(寅時 · 새벽 3시 경)께 감영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감영군이 패하여 도리어 살해당했다. (주석 12)

몇 가지 자료를 종합할 때 관군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관군은 경군의 지원군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동학군 활동을 견제하기로 하였는데, 김달관 · 이재섭 등이 공명심에서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관군은 참패하고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하였다. 일본인 신문기자 기꾸지의 기록이다.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SBS들라마 "녹두꽃" 한 장면 죽창을 들고 진군하는 동학농민군
ⓒ 추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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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은 구식총 30개, 기타 칼 수백 개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죽창으로 대항할 뿐이었다. 동학군이 이평면을 지나 두승산 기슭 깊은 계곡인 시목리(枾木里)에 도착하였을 때는 전체 세력이 2,000명이었다.

시목리는 약간 높은 구릉지대로 그 곳에 십여 채의 시골집이 있었는데, 닭 울음소리가 집을 감싸고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완전한 산골이었다. 동학군은 이곳에 본진(本陣)을 설치하였는데, 그들의 계획은 방어하기에 편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관군이 공격하여 올 경우 두승산 동쪽의 좁은 계곡에서 공격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4월 6일 아침, 급히 온 사자가 관군이 대규모로 이 방면을 향해 진군 중임을 알려왔다. 관군은 부대를 세 개로 편성하였는데, 첫째 부대는 약 500명으로 송봉호(宋鳳浩)가 지휘하였고, 둘째 부대는 300명으로 이재한(李在漢)이 통솔하였으며, 셋째 부대는 보부상 800명이 별동대로서 뒤따르고 있었다. 총지휘하는 이용태는 중앙에 있고 관군의 선봉은 대포 2문을 끌었으며, 전위의 군사는 정교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모두 군복을 착용한 그 모습은 정연한 것이 동학 잡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행군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동학군의 참패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군은 관군의 행군을 보고 길에서 공격하려 하였지만 전봉준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4월 6일 저녁, 관군은 모두 황토현(黃土峴)에 도착하였다. 황토현은 사자봉(獅子峯)이라고도 불려졌는데, 동학군은 그 곳을 점령하고 "사자는 사시(死屍)와 통하니 이곳에 관군의 시체를 매장하자"고 하는 등 사기가 매우 고양되었으니, 투지가 더욱 굳세게 되었다.

관군의 본영지의 황토현과 동학군의 본진인 시목리는 서로 15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는데, 이곳은 두승산 기슭의 줄기를 이룬 곳이었다.

그날 밤, 관군은 군사가 많음을 믿고 보부상의 첩보에 안도하여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았고, 관군의 막사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동학군의 척후병은 황토현의 본영에 접근하여 그 실상을 탐지하였지만, 관군의 지휘관과 군사들은 다음날의 싸움도 하기전에 주연을 베품으로써 이날 행군한 피로를 더욱 심하게 하는 등 적의 진지가 가까이 대치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전봉준은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오늘 밤 안에 있으며 기묘한 계책으로 야습하여 관군을 한 번에 쓸어 버려야 한다는 뜻을 명령하고, 진영 내의 모든 군사가 수면에 깊이 빠질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 13)


주석
10> 앞의 책, 『동도문변』, 최현식, 앞의 책, 69~70쪽.
11> 『갑오약력(甲午略歷)』, 최현식, 앞의 책, 70쪽.
12> 「양호초토록(兩湖招討錄)」, 4월 초 9일조, 최현식, 앞의 책, 71쪽.
13> 기꾸지(菊池讓), 『동학농민전쟁연구자료집』(1), 174~176쪽.(기꾸지는 일본신문 특파원으로 1894년 조선에 와서 을미사변 등을 모의한 인물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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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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