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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내동 삼성아파트의 경우 실거래가 3억9500만~4억9700만원인 33평을 3억원 이상 높은 7억~8억에 6억6천만~7억5천만원인 44평을 4억원 비싼 10억~12억원에 내놓기로 담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부천시 범박동 현대홈타운 51평형은 실거래가가 4억9500만~6억1천만원이나 짬짜미한 호가는 7억2천만원이었다." (<한겨레> 2006년 10월 1일)

2006년, 그러니까 14년 전의 신문기사 내용이다. 성내동 삼성아파트의 요즘 시세를 검색하니 25평형이 7억이다. 참 지긋지긋한 아파트 광풍이다. 언제까지 사람 사는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2019년은 아파트 투기 바람이 휘몰아친 한 해였다. 10억, 20억, 30억이 넘는 시세에 놀라 아예 내집 마련의 꿈조차 꾸기 어려워졌다. 조금은 좀 잠잠해졌다지만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돌아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2006년 부동산 투기의 재판이다.

언제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집으로 돈벌려는 일이 없어야 한다. 월급 모아 1억원 모으는데도 몇 년이 걸려야 하는 현실에서 젊은이들의 소박한 꿈을 짓밟지 말아야 한다.

2006년 <오마이뉴스>에 '치솟는 집값은 젊은이에 대한 죄값'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제 2020년, 14년 만에 다시 부동산 투기의 시즌2가 돌아오는가? 참 난감하고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나도 퇴직하고 힘이 빠졌는데 부동산 열기는 지치지도 않나보다. 인간의 재물욕에 대한 상징을 보는 듯도 하다.

     너에게 소리친 저 짐승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길을 비켜주지 않으며
     잔인하게 괴롭힌 다음 죽여서 먹어치우는게 일쑤로다.
     태어나면서 잔혹무도, 폭악하며, 죄많은 성질이어서
     먹어치우고도, 먹기 전보다 더 먹고 싶어하는 놈이로다.
                                                                      - 단테 <신곡> 중에서
 

참으로 무서운 탐욕에 대한 묘사다. '먹어치우고도, 먹기 전보다 더 먹고 싶어하는 놈'이 바로 탐욕이라니.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와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고통 속에 살았던 적이 있다.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 들은 기막힌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극히 소수겠지만 일부 부유층들은 치솟는 이자가 좋아서 술 먹으며 건배할 때 '이대로'라고 했다는 것이다. 설마… 했지만 인간이 탐욕에 빠질 때 무슨 짓을 못하랴.

그래도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의식주(衣食住) 문제다. 입고, 먹고, 자는 일은 최소한의 생존권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허생은 변부자에게 만냥을 빌려 과일을 매점매석하여 10배를 번다. 그 돈으로 제주도의 말총을 독점하여 양반들이 망건을 쓰지 못하게 되자 가격이 10배로 치솟는다. 1만냥으로 100만냥을 벌어 그 돈으로 도둑들을 모아 섬으로 간다는 얘기다.

지금으로 보자면 매점매석이나 투기에 해당되는 불법적인 일이다. 허생은 스스로의 행위가 정당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후세에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사실 집 한 채 있는 사람은 집값이 올랐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그 집을 팔아 시골이나 변두리로 가지 않는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집값이 자연스럽게 오르는 것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투기 행위이다.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이며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희망을 꺾는 일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3고(苦)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 결혼, 집이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취업하고 집이 있어야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낮은 출산율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게 하는 현실이다. 집값을 투기로 올려놓는다면 젊은이들의 희망과 의지를 꺾는 일이다.

치솟는 집값은 결국 젊은이에 대한 죄값이다! 집값이 올라 희희낙락할 때 젊은이들은 울고 있다. 그 중에는 당신의 자녀도 있을 수 있다.

국가가 튼튼해야 미래가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931번의 외침을 당했다고 한다. 나라가 허약해 일제에 빼앗기기도 했다. 혼자만 호의호식하는 것도 나라라는 울타리가 있어야 할 때이다. 젊은이들의 어깨에 나라의 미래가 있다. 어른이라면 젊은이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줘야 한다.

노인 인구가 올해 800만에 달할 것이라 한다. 고스란히 젊은 사람들의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집값이란 짐까지 얹을 것인가. 치솟는 집값을 좋아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든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이기심이다. 나라가 힘들고, 젊은이들의 처진 어깨를 보면서도 나만 '이대로' 가도 되는 것인가.

몹시 추운 겨울. 들판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얼어서 죽어 있었단다. 가운데에는 모닥불 피운 흔적이 있었다. 사람들의 짐을 뒤져보니 땔감할 것들이 남아 있었다. 추워서 죽을 지경이 되어도 내것만은 꼭 쥐고 있던 것이다. 극단적 이기심은 사회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결국은 자신마저 망치는 일이다.

사람은 사회라는 틀에서 살아간다. 투기라도 해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염치없는 짓이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볼테르는 '파렴치한을 분쇄하라'고 일갈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의 기본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심한 이야기라 탓하지 말라.

치솟는 집값의 시즌2를 반복하지 말자. 또다시 '집값'이 젊은이를 울리는 '죄값'이 되어선 안 된다. 단지 정부 정책만으로 그것을 잡아달라고 할 것인가. 집으로 돈 버는 것을 부러워말고 부끄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부러워하는 순간 당신도 거기 일조하는 셈이다.

생존의 기본권인 의식주만큼은, 특히 집을 대상으로 돈 욕심은 더 이상 부리지 말자. 그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최소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치솟는 집값.hwp

태그:#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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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꿈마저 없다면 삶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혁이나 혁신이나 실은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의 다른 어휘일 뿐일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교육이고 내 글쓰기가 문화라고 한다면 특히 그런 쪽의 이데아를 찾고 싶다. 물론 내가 찾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정답보다는 바른답을 찾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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