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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다시는 이 사회에 한빛같은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함과 한빛이 이 사회와 청년들에게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를 바라며 엄마로서 한빛에 대한 그리움을 기억하며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한빛 PD가 남긴 숙제를 이어가기 위해 유가족이 설립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홈페이지 '빛이 머문 시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편집자말]
외가집 벽에 30년 넘게 안방 벽에 걸려 있던 가훈. 친정아버지가 가훈을 노랫말로 손수 작곡해서 노래로 불렀던 가훈, 친정아버지께서 직접 쓰셔서 게시함.
▲ 가훈 외가집 벽에 30년 넘게 안방 벽에 걸려 있던 가훈. 친정아버지가 가훈을 노랫말로 손수 작곡해서 노래로 불렀던 가훈, 친정아버지께서 직접 쓰셔서 게시함.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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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을 즐기셨다.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이니 온 식구가 모이는 유일한 시간은 밥 먹을 때이긴 했다. 아버지는 밥상을 앞에 두고 칭찬도 하시고 교훈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물론 혼난 적도 있었다. 야단을 맞을 때 끔찍했던 것은 입안에 밥은 가득한데 콧물 눈물이 쏟아지려 할 때였다. 밥 먹다가 울면 안 되기 때문에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참았던 적도 많았다.

그 때 아버지한테 들은 말들이 은연중에 나를 지배했다. '눈높이 교육'도 그랬다. 그날도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어느 미술관에 한 관람객이 들어왔다. 그 관람객은 낮은 자세로 불편하게 앉아서 그림을 바라보며 감상했다.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다음 주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그림 관람을 올 교사라고 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그림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이야기 끝에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교사가 있었나보다 하고 잊었다. 그러다 어린 한빛에게 학습지를 시키는데 '눈높이 수학'이었다. 이 회사의 창립이념이 그 일화와 관계있는지는 모르나 '눈높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 맞다. 눈높이 교육. 무의식 속에 '눈높이'는 교사가 되고 엄마가 되었을 때 나의 실천 철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아이(학생) 중심'과 '(학생)자치-스스로'를 내재화시켰다. 아버지는 하고자 하는 교육활동에 갈등이 있을 때는 '학생중심'인지를 기준으로 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학생)자치'를 키워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많이 강조하셨다. 어릴 적 우리집 가훈은 '스스로 문제를 찾아 해결하고 끝없는 사랑 속에 더불어 살며 정성들여 봉사하고 감사드리니 당당한 생활로 즐거운 우리집'이었다. 지금 보니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인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친구네 집에 붓글씨로 써 있던 근엄하고 짧은 가훈에 비하면 우리집 가훈은 외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상관없었다. 가훈을 노래로 불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훈을 노랫말로 손수 작곡을 하셨다. 매일 흥얼흥얼 노래하셔서 우리는 안방을 드나들며 저절로 암기했다. 한빛 한솔도 외가집 가훈을 산토끼 노래보다 먼저 접했다. 물론 두 손을 공손하게 맞잡고 가훈을 노래 부르면 외할아버지가 치킨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니까 더 빨리 외웠을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가훈 만들기 숙제가 있었다. 가족회의를 통해 정하자고 했는데 급했는지 한빛이 초안을 만들었다. '스스로'가 여기 저기 들어있고, 외갓집 가훈을 거의 표절한 긴 한글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감사했다. 자식들에게 가치를 심어주기 위해 깊이 고민하셨을 시간을 한빛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진정 소중한 자산을 물려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감사할 줄 몰랐다.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가 유럽배낭여행에서 돌아온 한 달 후 돌아가셨다. 마치 우리가 잘 돌아온 것을 보려고 기다렸던 것처럼.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묵주기도를 매일 100단 이상을 하셨다. 100단을 기도하려면 7시간이나 걸린다. 오로지 기도만 하신 거였다. 초등학생 방학실천표처럼 달력에 표시를 해 놓았는데 여백이 없었다. 아이들과 첫 해외배낭여행을 떠나면서 나도 두려웠는데 아버지도 엄청 불안하셨을 것이다. 평생 비행기도 안 타셨던 아버지는 불안감을 묵묵하게 기도로 극복하셨던 것이다.

막내딸 결혼을 보려면 담배를 끊으라는 의사의 말에 그날로 끊으셨다. 모두가 아버지의 결단에 놀랐다. 아버지는 그만큼 겁도 많으셨다. 또 말보다 실천이 우선이셨다. 실천을 통해 검증되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혼자 삭이고 시행착오를 거치셨다. 배낭여행 중 하루에 한 번만 국제전화를 한 게 후회되었다. 아버지는 손자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초조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전화 자주 하라고 주문하지 않으셨다.

초등학생 때는 야영을 자주 하지만 아이들은 캠핑용품을 서로 안 가져오려고 한다. 아이들의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공동체 삶을 가르치려는 교사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교사로서 공감하기에 한빛 한솔에게 친구들이 귀찮아하는 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결국 덩치가 큰 텐트나 등산용 그릇은 다 한빛 몫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가보면 아이들은 다 집에 간 텅 빈 운동장에서 한빛이 혼자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한빛아빠는 텐트를 걷고 나는 밥과 반찬 찌꺼기들이 남아있는 그릇을 정리했다. 한빛은 흙덩이와 함께 굴러있는 수저들을 챙겼다. 텐트는 고리가 망가졌고 폴대와 팩은 개수가 모자랐다. 비싼 건데 속상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했지만 내 몫이려니 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것은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내 마음을 달랬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면서 나는 아버지를 수없이 만났다. 원칙을 외면하고 싶을 때, 나만 상식선을 지키면 뭐해 하고 그 가치를 무시하고 싶을 때 아버지는 꼭 나타나셨다. 꼼수나 정치적이란 말을 '운영의 묘'로 치환하면 안 되느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못했다.

다만 내 선에서 정리 못 한 채 어린 한빛에게도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었겠다.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외할아버지, #한빛센터, #원칙,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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