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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휘날리며~흩날리는 벚꽃잎이~' 찾아왔는데, 세계적인 비상사태 덕분에 오늘도 집에 있습니다. 별 수 있나요. 오늘의 무료함을 채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맛있는 배달음식 시켜먹고, 넷플릭스 좀 보다가, 나 없는 바깥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뉴스를 보고, 코로나 사태 이후로 만나지 못해 얼굴이 가물가물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수다를 떠는 것 정도입니다.

오늘은 아끼는 친구, 김동식에게 전화를 걸어봅니다. 요즘 뭐하고 살았냐, 오늘 몇 시에 일어난 거냐 이 게으른 자식, OO이는 잘 지낸다니, 같은 사소한 대화가 오고갑니다. 그러다가 대화는 세상일로 옮겨갑니다.

아, 오늘은 '박사방'이야기가 나왔네요. 박사방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미성년자 16명을 포함해, 현재까지 밝혀진 피해자만 74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박사방 운영자인 조주빈의 범행 사실과 신상이 공개되고, 경찰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자 박사방 이용자들이 더 보안이 철저한 메신저로 이동해 계속 성착취 동영상들을 공유했다, n번방 운영자인 '갓갓'이 박사방에서 자신은 절대 안 잡힐 것이라고 과시했다, 이런 이야기들도 들려오네요. 세상에 그런 xx들이 다 있어, 너무 끔찍해, 그런 놈들은 앞으로 고개 들고 살면 안 되니 싸그리 다 신상 까발려야해, 이런 인간을 내가 길거리에서 마주쳤을까 치가 떨려, 이와 같은 격한 분노와 공감의 말이 오갑니다.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남자들 중 확실히 6만 명이, 그리고 아마도 더 훨씬 많은 수가 이런 흉악한 성범죄에 가담하기를 평범한 일상처럼 해왔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 화가 나서, 나는 여성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에 대해 열변을 토합니다. 동식은 잠깐의 침묵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
ⓒ PublicDomainPictur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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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억울할 만 합니다. 김동식이 성착취 영상들을 만들어서 풀거나 보는 그런 추악한 짓을 한 건 아니니까, 그들과 한 무리인 것처럼 불리면 당연히 불쾌하겠죠. 수만 명의 다른 남자들이 그런 거지, 당신은 이번 박사방 사건 이야기를 듣고서 인상을 찌푸리고 화내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주변 평판도 괜찮고, 꽤나 사려 깊어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당신의 모습을 신뢰하고 좋아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면 안타까울 것 같고, 앞장서서 변호해주고 싶기까지 할 것 같아요. 당신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은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도 괜찮은가요?

동식이와 나의 차이

학창시절 '사회탐구'를 배우면서 '성취지위', '귀속지위'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생각납니다. 성취지위는 개인적인 노력이나 공개경쟁을 통해 얻어진 사회적 지위를, 귀속지위는 개인이 출생이나 직접적인 가족적 배경의 결과로서 할당받게 되는 사회적 지위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두 분류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숲속에서 혼자 살아갈 것이 아닌 이상, 내가 원하고 노력해서 얻은 지위들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지위들과 그 지위에 따른 역할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성품과 정체성에 깊숙이 파고듭니다.

김동식, 당신은 ㅇㅇ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고, 여러 사람의 자랑스러운 친구이고, △△동아리의 분위기 메이커였으며, ㅁㅁ기업의 성실한 인턴입니다. 이것들은 다 당신이 노력해서 얻었어요. 박수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들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대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중산층 집안의 첫째이며, 청년이라고 불릴 나이의 젊은이이며, 남성입니다. 이 중 마음에 드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별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있겠지만 이것 모두 다 당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 중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의 지위를 가진 것은 당신의 인생에 꽤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입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전달되지 않는 성에 대한 지식은 폭력적이고 편견에 가득한 온라인과 또래들의 성 담론으로 대체되고, '야동'이라는 이름의 불법촬영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영상들을 보고 성에 대해 알아갔겠죠.

남성의 성욕은 당연하고 무절제하게 표출되어도 괜찮다는 사회적 통념은 올드하다고 여겨지긴 해도 여전히 존재해서, 성인이 되면 성매매를 가볍게 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남자다움'을 알려주겠다는 인생선배들은 여자를 '보호'하고 잘 '다룰' 수 있는, 마초문화를 그대로 전달해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살아왔다면, 아무리 건강한 인식을 가지고 성장하려고 노력하려고 해도 여성들이 겪는 두려움과 소외에 무뎌지고 웃어넘기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요.

누가 '응애'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가부장제의 폭력에 가담해야지, 결심하면서 태어나나요. 나도 '응애'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남자들에게 분노를 느껴야지, 한 적 없는 것이랑 똑같아요. 그것이 힘이든, 짐이든 간에 다들 의도하지 않은 것을 손에 쥐고 살아가게 됩니다. 차이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편안했다면, 딱히 손에 뭘 쥐고 있는지 아닌지 인지하기 어려워진다는 점 정도가 있겠죠.

당신은 남자인가, 내 친구 동식이인가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하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닌데"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하다
ⓒ peakpx
 
남자, 여자라는 성별로 양분된 구도 속이 아니더라도(물론 이 구도는 수많은 구도 중 하나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중요하지만), 내가 의도치 않게 갖게 된 지위와 그 속에서 얻은 습관들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많습니다.

사지 멀쩡한 것에 감사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자란 비장애인이 장애인 센터에 봉사 다녀온 경험의 '감동'과 '감사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학벌에만 지나친 권위가 주어지는 체계 속에서 살아온 부모가 무슨 끔찍한 일인 양'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막노동 하는 거야'말하는 것, 밑천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청년들을 두고 어른들이'아프니까 청춘이다,' '꽃다운 시절을 만끽해라,'라고 말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는 것,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저조한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이 우울증을 낭만화한 영화를 보며 '아름답다'라고 평하는 것,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한 사람의 가장 사소한 습관들도 사회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구현이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냥 '나'가 아니라 무지한 가해자로 비춰졌을 겁니다.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선상에서 바라본 당신은 그냥 제 친구 김동식입니다. 꽤나 열심히 살아온 그에게 화를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선상에서 바라본 당신은 남자들의 삶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회구조에 영향 받고 이를 답습해온 사람의 일원입니다.

글 오서영 / 바람 저널리스트

태그:#박사방, #N번방, #조주빈, #일반화, #6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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