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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사랑이 넘치면 견딜 수 있는 걸까? 나도 건우를 엄청나게 사랑하는데…. 육아가 힘들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시작했을 때의 당찬 마음들은 온데간데없고 육아를 하며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후회만 들었다. 내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정체성이었다. '한때는 나도 잘 나갔는데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육아를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나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믿었던 아내도 바쁜 직장 생활 탓인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고 답답한 내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디 한 곳 속마음 털어놓을 데 없었던 나는… - 111쪽
 
결혼 5년 만에 인공수정으로 얻은 아이에 대한 설렘과 그로 인한 행복은 잠깐. 아내가 불안해하거나 답답해하며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지는 등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어서였다. 산후우울증이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날로 심해진다.

상담 의사가 우울증 치료로 권한 것은 출산 전 하던 일을 해본다거나, 사람들과 소통해 보는 것.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린 데다가 주변 어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아빠가 육아를 전담하게 된다.

'신혼 때부터 식사 담당을 자처하고 출산 후에는 육아를 결심할' 정도로 집안일은 물론 육아에 적극적인 아빠였다. 그런데도 육아를 도울 때와 전담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고 한다.

내 현실이 되자 그동안 아이를 함께 돌보면서도 전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고 전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된 것. 그래서 그동안 머리로 이해했던 아내나 수많은 육아 맘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 다니는 아빠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야, 낮에 커피숍 가봐라. 전부 다 아줌마다. 팔자도 좋지. 남편들 직장 보내놓고 커피숍에 모여 앉아서 남편 돈으로 커피 마시고 수다 떨며 시간 보내고 있으니 부럽다, 부러워'라는 푸념이다. 그래서 내가 엄마들에게 물어봤다.

"주부들도 마찬가지예요. 주부들에게 집은 직장이란 거죠. 저희도 가끔 외근도 가고 싶고 기분 전환도 하고 싶고 그런 거죠."

"남자들이 회식 자리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듯이 우리들도 아이 관련한 정보 교류, 교우 관계 때문에 숙제하듯 가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남자들 술값이 더 많이 들겠어요. 우리들 커피값이 더 많이 들겠어요? 오히려 모임의 효율성도 우리가 더 높지 않나요?"

"맞아요. 너무 웃긴 게 남자 회사원들 말이에요. 출근해서 담배 한 대 커피 한 잔, 점심 먹기 전 담배 한 대 커피 한 잔, 점심 후 담배 한 대 커피 한 잔, 졸린다고 담배 한 대 커피 한 잔(…) 퇴근 후 술 한 잔, 두 잔. 결국 만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나요? 그러면서 말은 번지르르하죠. 업무의 연속이라나? 우리 동네에 대기업 건물이 여섯 개쯤 있는데, 건물 앞 흡연 공간에 하루종일 사람이 바글바글해요. 제가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은 대체 일은 언제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니까요. 그러면서 하루종일 육아하다 잠시 짬을 내 커피 한잔하는 여자만 보면 그렇게나 험담을 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요." - 161~163쪽
 
작가는 육아를 전담하면서 그동안 색안경 끼고 보던 육아 맘들 관련 어떤 사정들이 이해되었다고. 그리고 여자들의 며느리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헤아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 책표지.
 <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 책표지.
ⓒ 포레스트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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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포레스트북스 펴냄)은 아내의 산후우울증 치료 때문에 얼떨결에 육아를 하게 된 한 아빠가 육아 6년 동안 겪은 크고 작은 우여곡절들을 녹여 쓴 에세이다.

외출 중 기저귀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엄마들이 주로 이용하는 수유실에서 갈아야만 했던 사연, 놀이터 등에서는 인사하고 지내지만 커피숍이나 누구네 집에까지 어울려 교류하지는 못했던 일 등이 나온다. 자연히 육아 정보를 얻는데 불리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함께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내 아이만 외톨이가 되는 현실 등 아빠 육아의 어쩔 수 없는 한계, 그 사연들을 들려준다.

아울러 크고 작은 육아 고충들, 노키드존 확산이나 맘충처럼 육아 맘들을 지칭하는 용어나 관련 사회 분위기에 대한 아빠 혹은 남성으로서의 시각, 부부가 육아를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 육아함으로써 얻은 것들, 육아 선배로서 육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육아 팁과 철학 등을 자분자분 5장에 걸쳐 들려준다.
 
내가 지난 6년간 육아를 하며 배운 건, 아이는 나를 보고 자라지만 나는 아이를 보며 배운다는 것이다.-(223쪽)
 
육아로 지쳐 실신해 병원에까지 실려 갔던 이 아빠는 말한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육아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행복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아빠들이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50대인 내가 생각해도 육아는 힘들다. 첫째가 두돌 무렵, 육아로 진이 다 빠진 때문인지 생리 때면 아주 잠깐씩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포를 겪기도 했던지라 더욱 힘들게 느껴지는 요즘 젊은 부부들의 육아이다.

그래도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두 번의 화재와 사업 실패 등, 끊이지 않는 악재로 굴곡진 지난날이었다. 그 힘든 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 덕분이었으며 여전히 두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살아가니 말이다.

그래서 늘 아쉽다. 나름의 사정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겠으나 누군가 육아가 힘들다고 하니까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부부들도 있는 것 같아서, 그로 아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아예 모르고 살아가는 부부들도 많은 것 같아서 말이다.

참, 이 아빠는 교사인 아내가 출퇴근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지역으로의 발령받아 주말 부부로도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밤이면 볼 수 있던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면서 아이가 많이 허전해하고, 그래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아이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읽은 부분이다.

힘들고 불편한 현실은 그 상황을 기피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최근 몇 년 다양한 정책을 펴도 출산율이 좀체 높아지지 못하고 오히려 줄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저자의 경우처럼 당사자들의 처지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제도나 정책 현실 때문 아닐까. 이처럼 추측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동안 관련 전문가들이나 엄마들이 쓴 육아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어쩌면 최근 늘고 있는 아빠 육아자들이 겪는 한계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빠 육아 경험담인 이 책이 더욱 필요하겠다 싶다. 아빠의 육아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만큼 남편에게 육아를 맡긴 아내들도 꼭 읽었으면 싶다.

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 - 육아는 왜 엄마만 해야 하나요?

도준형 (지은이), 포레스트북스(2020)


태그:#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 #전업대디, #산후우울증, #도준형(저자), #육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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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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