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1 08:52최종 업데이트 20.06.0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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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크로스는 1846년 '타운젠트 크로스(Townsent Cross)'에 의해 첫발을 내디딘, 어느새 17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필기구 전문 업체입니다. 처음부터 필기구를 생산한 건 아닙니다. 금과 은을 바탕으로 여러 장식품을 만들며 내공을 쌓아온 크로스는, 작은 금속을 쥐고 펴는 과정에서 익힌 세공 기술을 펜에 녹여내며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크로스는 전형적인 미국 제품답게 화려한 장식이나 컬러를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전면에 내세우진 않습니다. 과감하고 심플해 첫눈에 반하긴 힘들어도, 오래 볼수록 더 정이 붙는 디자인이 매력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첫선을 보인 센츄리는 특유의 슬림하면서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대중에게 주목 받았습니다. 정장 주머니에 꽂힌 크로스 볼펜의 반짝이는 캡 탑은, 진취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임을 드러내는 시대의 아이콘처럼 여겨졌습니다.


센츄리만큼이나 사랑받은 모델이 1993년 출시된 타운젠트입니다. 마치 사륜구동 차량을 연상시키는 견고함과, 요란하지 않아 되레 더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디자인을 무기로 크로스를 대표하는 핵심 라인 포지션을 확보합니다. 워터맨, 파카와 마찬가지로 크로스 역시 창립자의 이름에서 브랜드명을 따왔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든 제품에 자신의 이름을 담는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세상에 대한 도전의식의 발로로 해석됩니다. 브랜드와 제품명에 나를 온전히 담았는데 소홀히 만들었을 리가 없고, 대중은 그 당당함을 기꺼이 능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강할수록 조금씩 천천히
 

크로스 타운젠트 - 부러진 상태로 도착한 펜 ⓒ 김덕래

 
하지만 제아무리 견고한 프레임을 가진 '지프(Jeep)'도 절벽에서 구르면 지붕이 찌그러지고 차축이 휘는 것처럼, 이번에 의뢰가 들어온 펜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여기저기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충격으로 펜촉이 꼬이면서 휘고, 피드는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며, 그립 섹션은 길게 금이 갔습니다. 엉뚱한 곳에 펜촉이 꽂힌 상태로, 그렇게 많이 아픈 펜 한 자루가 제게 왔습니다.

수리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 예단하기 힘듭니다. 어쩌면 보내줘야 할 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름의 의미를 담아 가까운 분에게 선물한 펜인데, 망가져 서랍에 보관만 하고 있었다 해요.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펜이 부러졌다지 뭐예요. 펜을 잘 모르는 제 눈에도 살려내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일단 가져왔어요."

"휜 방향이 안 좋아요. 앞이나 뒤로 휘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측면으로 휜 것도 모자라 새끼줄처럼 꼬여 버렸어요."

"그렇지요? 제가 봐도 그렇더라고요. 저는 마음을 비웠어요. 못 고쳐도 당연한 거라 생각하니 맘 편히 한번 봐주기만 하세요."


절반쯤 포기한 듯한 그의 말이 되레 절 자극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살려내 달라 재촉하지 않는 그의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간절함이 차오르고 차오르다 끝에 닿으면 되레 마음을 내려놓게 됩니다. 다시 펜을 들여다봤습니다. 방법이 있을 듯도 싶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휘어진 펜촉과 부러진 피드 ⓒ 김덕래

 
타운젠트의 펜촉을 자동차에 비유하면, 마치 '모노코크 바디(Monocoque body)'가 아닌 '프레임 바디(Frame body)' 뼈대를 가진 차량에 가깝습니다. 강성 펜촉이라 어지간한 필압에도 잘 휘지 않지만, 한번 망가지면 손보기 훨씬 까다롭습니다. 버텨내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도 평소 스트레스를 꾹꾹 눌러 참다, 한 번에 터트리는 이의 폭발력이 엄청난 것처럼 말입니다.

측면으로 휜 펜촉을 금속 도구로 잡고 펴면 순간적인 힘을 낼 수는 있지만, 펜촉에 상처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금속과 금속이 맞닿게 되니 당연합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있더라도 펜촉이 잘 펴지기만 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문제는 순간적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펜촉이 부러질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유리병에 끓는 물을 갑자기 부어버리면 순간적인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병이 깨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 그러면 답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펴면 됩니다. 펄펄 끓는 물이 아닌 따뜻한 물을 넣으면 됩니다.

망치질 한 번에 대못을 끝까지 박을 생각하지 말고, 열 번에 나눠 못이 약간씩 들어가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일을 끝낼 수 있습니다. 성급하게 망치를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내려치면 자칫 못이 튀며 나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못허리가 구부러져 아예 못쓰게 되기도 합니다. 만년필도 같습니다. 내가 너를 손대고 있다는 걸 펜촉이 모르게 하면 됩니다.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작업
       

분해 후 세척한 상태의 부속들 ⓒ 김덕래

  

펜촉을 무수히 그어 살짝살짝 패인 나뭇조각 ⓒ 김덕래

 
그립 섹션(손으로 만년필을 쥐는 부분)에 생긴 크랙(틈)으로 부속 곳곳이 분리된 상태입니다. 완전히 분해해 세척한 다음 손보기로 합니다. 초음파 세척기에 넣고 눈에 안 보이는 부분 안쪽까지 반복해 씻어 냅니다. 나중에 접합 작업을 해야 하니 이물질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마감하면 사용 중 누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벌어지는 상황은 어쩔 수 없더라도, 형식적인 작업이 이뤄지는 건 지양해야 합니다.

부속을 세척하고 나면 뽀송뽀송하게 말려줍니다. 물기를 완전히 제거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나뭇조각에 살짝살짝 긋고, 손톱으로 다듬기를 반복합니다. 루페(확대경)로 수십 번, 수백 번 들여다봐도 좋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비슷비슷해 보이는 펜도 자세히 보면 상태가 다 다릅니다. 같은 배에서 나와 얼굴 어딘가가 닮은 형제들도 성격이 다 제각각인 것처럼, 동일 브랜드, 동일 모델의 같은 펜촉이라도 편차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추락했느냐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변형되는 펜촉을 다듬어가는 과정은, 마치 큐브를 맞추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큐브의 한 면만 생각하면 절대 나머지 다섯 면을 한 번에 맞춰내지 못합니다. 두루 살펴 가며 맞춰야 여섯 면 모두 단일 색인 큐브를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만년필 수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펜촉을 위, 아래, 정면, 측면에서 보며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수리 중인 펜촉 ⓒ 김덕래

 
많이 좋아졌지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손봐야 할 곳이 아직 많고, 펜촉도 더 다듬어야 합니다. 컨버터(잉크 저장장치)도 최고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손대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제 모양이 어느 정도 나오지요? 결합한 상태에서 펜촉을 다시 조정합니다. 잉크를 주입한 다음 또 다듬어야 하니, 만년필을 수리하는 건 어쩌면 인내심과의 한판 승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추락 시 충격으로 손에 쥐는 그립부가 깨졌습니다. 금이 간 상태로 거의 절반 이상이나 벌어져 상태가 심각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살려낸대도 쓰다 보면 누수가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거실 진열장에 모셔놓고 가끔 들여다보는 장식품이면 괜찮겠지만, 손에 쥐고 직접적인 힘을 반복해 주게 되는 부분이다 보니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일단 잘 세척 후 건조된 부속 안쪽 크랙부에 접착액을 얇게 발랐습니다. 그다음 바깥쪽도 펴 바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론 어림없습니다. 필압은 요행히 버텨주더라도, 책상 의자에 앉은 자세로 내 눈높이에서라도 한번 툭 떨어지면 다시 벌어질 게 분명합니다. 이럴 땐 확실한 마무리가 필요합니다. 마스킹 테이프로 감아 벌어지는 걸 막아주면 훨씬 더 견고해집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버텨줄 수 있습니다.
 

수리가 끝난 만년필 ⓒ 김덕래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다른 펜들도 쓰다 손상되면 이 테이프로 감아주곤 합니다. 눈에 거슬리는 문신을 한 게 아니라, 태닝한 거라 생각하세요. 테이프 끝부분도 접착액으로 마감했으니 손가락이 닿는다고 바로 떨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잉크 주입을 위해 병 잉크에 펜촉을 깊이 담그면 테이프에 묻어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컨버터를 병 잉크에 직접 담가 충전하는 편이 좋습니다. 지금으로선 그게 조금이라도 더 깔끔한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펜에 장착된 촉은 XF촉입니다. F촉보다 한 단계 더 가는 굵기의 Extra Fine, EF촉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어느 정도 가늘게 나와야 의미 있는 펜촉입니다. 작은 글씨를 써도 뭉개지지 않게, 그러면서도 거칠단 느낌이 덜 들게, 뾰족한 바늘 끝이 아닌 이쑤시개 끝처럼, 예리하지 않으면서도 끝이 살아 있게끔 했습니다. 잉크마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깐씩 캡을 연 상태로 두더라도 충분히 버텨줍니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분명 큰 수술을 받은 게 확실한 펜이니, 조심조심 써야 하는 게 맞습니다. 가급적 갖고 다니기보단, 책상 위에 놓고 쓰는 게 좋겠지요. 이동할 일이 있을 땐, 가능한 파우치에 담길 권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오래 쓸 수 있습니다.

휜 펜촉은 폈고, 부러진 피드는 필기 시엔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인 데다 사용 시 불편을 끼칠 정도는 아니며, 길게 금이 간 그립 섹션은 붙인 상태에서 한 번 더 감아줬습니다. 앞으로 한참 더 곁에 두고 쓸 수 있는 펜인데, 버려지는 건 어쩐지 서글픈 일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못돼도 좋으니, 그저 나름의 소신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기본'이란 무엇일까
 

수리 후 시필중인 크로스 타운젠트 만년필 ⓒ 김덕래

 
10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수입이 일정치 않아 힘들었던 시절, 결혼기념일 선물로 참치를 먹고 싶다던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집 근처 체인점에 갔습니다. 벽에 걸린 메뉴를 보니, 위에서부터 높은 가격이 순서대로 적혀 있습니다. 실장특선, 스페셜, 추천, 그리고 맨 아래 '기본'.

기본 2인분과 아이들에게 먹일 초밥을 주문했습니다. 어려 아직 글을 모르던 큰딸이 내 말을 듣고 물었습니다.

"아빠, 근데 기본이 뭐야?"

순간 당황했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제일 싼 거라고 해야 하나? "아... 그게... 음... 그건... 있잖아..." 술을 마시기도 전인데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주방 안쪽에 있던 실장님이 작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응. 있지. 기본은 가장 중요한 거야. 신나겠네? 아빠가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걸 주문하셨어."

짧은 선문답 같은 대화가 몇 차례 더 오고 갔지만, 그 이후의 대화는 기억에 없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자존감을 지켰단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렸던 것 같습니다. 얼굴이 먼저 웃는 실장님은 우리가 머물렀던 두어 시간 내내 끊임없이 메뉴에도 없는 새로운 음식과 처음 보는 부위들을 애들 앞에 내어줬습니다.

참치를 잘 모르는 눈으로 봐도 그건 분명 내가 시킨 '기본'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제가 시킨 건 분명 참치였는데, 실장님이 계속 내어준 접시에는 참치살보다 더 연하고 부드러운 배려가 가득 얹혀 있었습니다. 어쩌면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는 그 말 한마디가 내게 각별하게 다가온 건, 그 당시 내 마음이 어느 해보다 힘들어서였을 겁니다. 평생 가슴에 새길만한 말을 그날 받았습니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지났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시간이 참 빨리도 흘렀습니다. 몇 해가 지나 전보다 조금 자리가 잡힌 후, 가족과 함께 그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날과 똑같은 흰색 가운에 모자를 쓴 그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전보다 한 등급 위의 '추천'을 가족 수대로 주문했습니다.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참치 맛을 얼마나 알겠습니까만, 내가 주문한 걸 보고 그간 조금 더 나아졌을 우리의 형편을 그가 알아채길 바랐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당신이 건네준 말 한마디를 그간 힘들 때마다 곱씹으며 살았다, 우리를 배려해 줘 진심으로 고마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당신처럼 따뜻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어느 날 주변에 기꺼이 온기를 나눠주겠다는 분들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당신이 생각났다, '기본'의 귀함을 알게 해줘 고맙다는 내게, 그는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줬습니다.

작은 일은 하찮은 일의 전부가 아니라, 귀한 일의 첫 시작점입니다. 공(悾)을 들이면 빛이 나고, 그 빛이 점점 커지면 나를 감싸주는 보호막이 됩니다. 나를 키워주는 자양분이 됩니다. 아무리 작아 보이는 일도 가볍게 봐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너무 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결코 가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기본은 '소신'입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저는 나름의 기본을 지키며 하루를 살았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기꺼운 마음으로 저는 그렇게 살겠습니다. 

* 크로스(Cross)
1846년 미국에서 탄생한, 뛰어난 세공 기술을 기본으로 자리 잡아온 필기구 전문 업체. 만년필 이전에 볼펜으로 더 명성을 드높인, '미국 대통령의 펜'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브랜드. 정확하고 빈틈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마감이 특징인 독일,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찬사가 과하지 않은 이탈리아, 세필엔 견줄 업체가 없다는 일본. 이 만년필 강국들 사이에서 필기구계 선구자라는 자존감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미국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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