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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붙이기(naming)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그러나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기 때문에 간단치 않은 것일 게다.

예를 들어 유럽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식민지 개척'으로 이름붙이는 것과 '식민지 침략'으로 이름붙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다만 단어 조합의 차이 정도가 아니다. 현대에 들어 '식민지 개척'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면, 백인우월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라는 말을 무감각하게 쓰는 사람과 무심코라도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사람 사이에는 말도 못하게 큰 간격이 있다. 그건 영국령 어딘가 최소 한 곳에 항상 해가 떠있었다는 말이니까. (그만큼 수십 개의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라는 이름으로 전세계 방방곡곡에 퍼져있었음을 자랑하는 은유적 표현이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연루된 사람(들)에 무슨 이름을 붙이느냐 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의식을 환기할 수 있다. 애초에 다른 문제의식이 있어서 그 이름을 선택한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최종적으로 대중에게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는가 하는 점은, 정치적 운동의 시작이거나 성과일 수 있다. '5.16혁명'이 올바른 이름 '5.16군사쿠데타'로 규정된 것처럼, 또 '광주사태'가 '광주민중항쟁'이란 적합한 이름을 확증받은 것처럼. 3.1만세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자 주장하는 어떤 이들이 이를 위하여 운동하는 것처럼.

이름붙이기가 중요한 사례는 얼마든지 또 찾아볼 수 있다. 나치는 '유대인대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 '살해' 또는 '말살'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주지이동'으로 표현됐다. 나중에는 공식으로 '최종해결책'이라는 용어가 통용됐다. 그러나, 지금 '최종해결책'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네오나치가 아니라면) 거의 없다. 역사사실을 적시하는 기록이 아니라면, 나치의 이름붙이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나치의 생각을 이어받는 일임을 너도나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대학살'과 유사한 뜻의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용어를 자제하자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면 '홀로코스트'가 불에 태워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에 쓰이는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희생제물'이라는 이미지를 쓸데없이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보다는 '대학살(genocide, massacre)'을 사용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중립적, 객관적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

일반적인 사안에서도 중립적·객관적 용어의 정립은 때때로 지난한 토론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성(sexuality)의 면에서는 그것이 겹겹이 더 지난한 일이 된다. 십여 년 전 '고 장자연씨 사건'이 터졌을 때 '성접대'라는 표제어가 신문지상에 그야말로 횡행했다. 손님이 오면 마치 앉을 자리를 내주듯, 커피나 차를 내오듯, 여성의 성이 접대의 한 방편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깔고 있는 용어다. 그래서 나는 '성착취'라는 용어가 쓰여야 한다고 언뜻 생각했었다.

'장자연 성착취 사건.' 이렇게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단어들이 조합돼야 중립적, 객관적으로 잘 표현된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건대, 중립성·객관성이 덜한 저 표현('성접대')이 지닌 힘을 간과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성접대'라는 말은, '설명하는 힘'을 갖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성을 접대의 방식으로 쓰는 관행(?) 자체를 직접 겨냥하여 그것을 원론적으로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 개인 장자연의 사연에 각별히 집중하게 한다. 관행도 물론 거론되긴 하나, 관행을 시행한 가해자들의 비인간적 면면이 더 문제적으로 인지된다(누가 거기 있었는가, 무슨 행위를 시켰는가 등). 따라서, 해당사건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앞서 언급했던 '홀로코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는 가스실, 화장장, 수송기차, 집단수용소, 구덩이, 생매장 등의 이미지를 즉시 떠올리게 한다. 이 즉각성의 강렬함은 엄청난 설득력을 지닌다. '홀로코스트' 앞에는 굳이 유대인을 붙이지 않는다. 이해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살'은 워낙 여러 사례가 있어 대체로 한정하는 말 '유대인'을 붙이게 된다.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자행한 대학살의 특이점, 즉 '산업화된 대학살(학살명령자, 중간지도자가 직접 사람의 주검을 목격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의 극단적 반인륜성을 극명히 드러낸다. 모든 대학살이 반인륜적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가 주는 느낌은 강렬하고 확정적이다. 나치가 사용했던 얼토당토않은 용어 '최종해결책'을 뒤집고 무력화시키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위안부와 성노예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41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정의연 이나영 이사장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41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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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전 이사장 때문에 '성노예'라는 용어가 갑론을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치 '성노예'라는 용어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의연의 운동 자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적 논리전개로 보인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미루어볼 때 정의연의 인권운동가들이 할머니 인권운동가들과의 소통에 일정 부분 실패한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노예'가, 써서는 안 되는 몹쓸 용어인 건 아니다.

위안부는 가해자인 일본 측에서 볼 때 '위안(comfort, 慰安)'이다. '성접대'가 가해남성 측에서 볼 때 '접대'의 한 종류인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운동은 '성접대'를 '성착취'로 변화시키는 것을 운동내용에 포함한다. 성을 가지고 접대 따위를 시도하지 않게 되는 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운동의 이슈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정의연의 운동도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 '위안부'를 '성노예'로 개념정의하는 쪽으로의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꼭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세월이 흐르며, 어느덧 할머니들은 다만 위안부 생존자/피해자가 아니라, 여성인권운동가로서 대중에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객관화된 표현으로서 '성노예'는 즉시 폐기처분해야 할 용어가 아니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이 용어를 더 빈번히 더 많이 사용할 필요가 있다. 강제징용노동자를 일본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일본에 온 '조선 노동자'로 표현하지만 우리는 굳이굳이, 거의 필사적으로 'forced laborer'로 이름붙여야 하는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위안부'라는 표현은 일본을 거의 자극하지 않는다. 이 용어에 "돈 벌려고 자발적으로"를 덧입히면 '위안부'는 자발적 성매매여성이란 뜻으로 무리없이(?) 통용될 수 있다. 일본은 위안부문제를 그렇게 다루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안부라는 용어의 사건 설명력, 설득력을 존중한다. 그래서, 일본이 사용한 용어인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우리는 지금 여전히 전략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위안부운동'이라는 용어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종군'은 꼭 빼야 하지 않을까? 종군기자도 아니고 무슨···.

'위안부'라는 용어의 설득력이 이룩한 일이 있다. 그 용어는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함, 잔혹성, 무감각성을 드러낸다. 전쟁반대 및 평화를 위한 운동을 힘있게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당사자 할머니들이 그 용어를 원하니, 그 용어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또, 깜짝 놀랄 만큼 딱딱하게 들리지만 '성노예'의 객관성으로 지향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자선적·개별적 피해보상이 아닌 법적·정치적 노예해방을 환기함과 동시에 반여성주의 및 성차별을 철폐하는 여성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을 독려한다. 두 일은 서로 병립, 합력하는 게 좋다. 실제로 정의연은 '성노예'라는 말을 쓰되, '위안부'도 병행 표기하여 써왔다.
 
정치운동과 공론화운동

'위안부'를 국제사회에서 공론화하며 일본의 전쟁범죄에 관하여 소통하려면 영어표기가 필수적이었다. '위안부'를 영어로 'Comfort Women'으로 표기하면 몇 가지 난점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무엇보다 일본이 애용하는 용어라는 점),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일본군성노예)'로 쓰자는 제안이 나온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듣자마자 몇몇 할머니들은 대번에 거부감을 표현했다. 거부감의 내용과 깊이 면에서는 할머니들마다 개인차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정의연의 운동을 옆에서 보고 들은 (몇 번 수요집회에 참여한) 사람의 하나로서 '성노예'라는 단어가 거론되기 시작할 무렵 나는 "할머니들이 동의할까?" 궁금했었다. '성노예'라는 단어의 어감은, 당사자 아닌 내가 듣기에도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단어에 동의하지 않는 할머니들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할머니들과 잘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아니라, 20여 년부터, '성노예'라는 용어에 관한 논의가 건강하게 공론화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성노예'라는 단어를 처음 거론할 때 그것을 공론화하기엔 운동 자체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우선과제가 용어의 공론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론화는 대화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함께하는 운동가들 사이에 소통을 놓치면, 위안부운동 같은 국제적 정치운동은 폭발물을 안고 가는 셈이 되는 거다. 작고 가느다란 안전핀 하나에 의존하는...

이번 참에 운동가들 사이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더욱더 절감하며 고민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이는 사실 정의연을 비롯해 모든 사회운동가들을 향한, 나를 포함해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을 향한, 자그마한 희망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brunch.co.kr/@goodwood)에도 올립니다.


태그:#정의연,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정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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