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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또한 모든 것을 이어주는 존재다. ‘이음과 매개, 변화와 극복’은 자기희생 없인 절대 이뤄질 수 없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옛 다리부터, 최신 초 장대교량까지 발달되어 온 순서로 다룰 예정이다. 이를 통해 공학기술은 물론 인문적 인식 폭을 넓히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편집자말]
노두길에서 바라 본 현재 공용 중인 길과 공사중인 교량의 모습
▲ 노두길과 갯벌의 전경 노두길에서 바라 본 현재 공용 중인 길과 공사중인 교량의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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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도 징검다리가 있다. 신안 추포도∼암태도를 잇는 징검다리를 최고로 꼽는다. 암태도 가는 길은, 가히 다리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아니 신안 섬 전체가 다리로 연결된 다리 박물관이 되어 있다.

목포에서 압해도로 가는 압해대교는, 3경간 닐센로제아치교이다. 압해에서 암태도로 가는 길은 1004다리라고 명명한, 연속보의 접속교에 3주탑 현수교와 2주탑 사장교가 높은 위용을 뽐내며 나란히 서 있다.

암태도 서남쪽에 추포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지금이야 암태도와 추포도 사이에 콘크리트 방조제를 놓아 두 섬이 연결되어 있고, 그 옆으로 현대식 연속보의 형교가 조만간 완공될 예정이지만 예전에는 징검다리로 왕래했다.
  
추포도∼암태도 섬을 잇는 노두(路頭)길이다.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관리를 하지 않아 그 흔적만 진하게 남아 있다. 발이 빠질 각오를 한다면, 지금도 못 건널 징검다리는 아니다.
 
노두길 옆 멀리 현대식 형교를 공사 중인 모습
▲ 추포노두길과 공사중인 다리의 모습 노두길 옆 멀리 현대식 형교를 공사 중인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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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용중인 콘크리트 길과 공사 중인 다리가 생기기 전 노두길
▲ 추포노두길 옛 사진 현재 이용중인 콘크리트 길과 공사 중인 다리가 생기기 전 노두길
ⓒ 이재근. 신안군청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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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포리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주민은, 300년 전 그 옛날 선조들의 노고를 말한다. 현대식 다리가 완성되고 콘크리트 방조제가 철거되면, 바다를 건너던 옛 노두가 다 드러날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바닷물의 흐름이 제 자리를 되찾는다면, 노두도 원상회복 된다는 설명이 부가된다.

섬마을 주민들이 왕래를 위해 2.5km 갯벌 구간에 3600여 개의 노둣돌을 놓아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굄돌까지 합하면, 1만개가 넘는 돌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단한 공력이다. 몇몇의 힘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아마도 두 섬 백성들의 뜻이 하나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이 징검다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뒤집어줘야만 미끄러지지 않았다. 노둣돌을 뒤집는 그 노고가 어떤 것일지 상상이 안 된다. 일 년에 한 번씩 3600개의 무거운 돌을 뒤집고 닦았다. 노둣돌에 낀 미끄러운 바다풀과 물때를 씻어 냈다.

노두길을 만들 때를 상상해 보았다. 분명 갯벌이 드러나는 썰물 때밖엔 작업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썰물로 갯벌이 드러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뿐이다. 그 짧은 시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갯벌에선 맨몸으로도 걷기가 힘들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질척거리는 갯벌로 무거운 돌을 옮긴다. 자리를 잡고 돌을 안착시킨다.

갯벌에 돌을 놓아 '돌 징검다리'를 만들어 섬을 연결하는 통로로 삼은 공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금도 그 공력을 기리고 있다.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노두길 옆에, 처음 다리를 만들 때 세운 노도비(路道碑)가 서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풀에 묻혀, 끝내 찾지는 못했다.

일제의 통치방법도 시정케 한 암태도 소작쟁의
 
암태도에 있는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탑 전경
▲ 암태도 소작쟁의 탑 암태도에 있는 소작쟁의를 기념하는 탑 전경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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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는 '소작쟁의'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섬이다. 소작쟁의는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일제 관료와 경찰, 암태도 소작인들 간에 벌어진 소작료 전쟁이었다. 문재철은 암태도 출신으로 전형적인 친일부역지주였다. 그는 암태도·자은도 등 신안의 여러 섬과, 전북 고창 등지에 엄청난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면적이 약 750만㎡(약 226만평)라 하니, 엄청나게 광활한 토지다.

1923년 쟁의 당시 문재철이 암태도에서만 소유한 농지가 약 139만㎡(약 42만평)였다고 한다. 섬의 농토 전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때 소작료는 농지임대료(地代)와 농사경비를 공동으로 부담하는 '반분타조제(半分打租制)'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경비까지 합해야, 총 소출의 5할을 넘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낮은 곡식 가격을 지켜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과 동남아 점령 등, 전쟁을 수행할 기반이 필요했다. 따라서 군수산업 기반의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의 동원이 필수였다.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강제 징용된 노동력에, 자국 노동자들의 저임금 유지가 전쟁수행의 첫 관문이었다.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은, 식량 가격을 낮게 유지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강력한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암태도 대지주 문재철의 수익이 점차 감소했다. 그러자 문재철은 소작요율을 대폭 인상시켜 이를 만회하려 한다. 아니 욕심도 과했으리라. 무려 7∼8할의 소작료를 징수하려 한다. 이에 암태도 소작인들이 반발한다. 소작인회의를 조직한다.

1923년 8월 추수기를 앞두고, 4할로 인하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재철은 거절했다. 소작인들은 추수거부와 소작료 불납동맹으로 이에 맞선다. 이때 목포경찰서는 일본경찰을 출동시켜 소작인들을 협박한다. 일본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문재철은 소작료를 강제로 징수하려 했다.
  
문재철은 악랄했다. 개개 소작인에 대한 회유와 협박에 나선다. 소작인들은 단결력으로 이에 대응했다. 자체 순찰대를 조직하여 1924년 봄까지 소작료불납항쟁을 계속 이어 나간다. 1924년 3월 27일 면민대회를 열어 소작인의 단합을 과시하며, 몇 가지를 결의한다.

'5월 15일까지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파괴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문재철 측에서는 폭력으로 대응해 왔다. 면민대회 후 귀가하는 소작인들을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아울러 면민대회에서 결의한 소작인들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버틴다. 사사로운 시비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작인들은 이런 사정을 언론에 호소한다. 언론들은 연일 암태도 소작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배후에는 일제가 있었다. 집요한 일제의 탄압이 계속된다. 그러자 화가 난 소작인들이, 4월 22일 문재철 아버지 송덕비를 부숴버린다. 이 자리에서 문재철 측 청년들과 충돌이 있었고, 소작인 50여 명이 일본경찰에 연행된다.

소작인들은 6월 2일 면민대회를 다시 열고 강경투쟁을 결의한다. 소작인들 400여 명이 6월 4일부터 8일까지 목포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인다. 6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농민들은, 굶어 죽을 각오로 맞서기로 한다. 7월 8일부터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26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 소식에 각계각층 인사들이 지지를 보내준다. 변호사들은 무료변론을 자청하기도 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제 전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일제는 소작쟁의가 더 확산된다면, 통치기반에 큰 균열이 올 것을 염려한다. 또한 쟁의가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급기야 중재에 나서게 된다.

결국 소작료는 4할로 조정되고, 쌍방 간 고소·고발도 모두 취하된다. 부서진 비석은 소작인들 부담으로 다시 세우기로 한다. 1년여에 걸쳐 벌어진 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후 도초·자은·지도의 소작쟁의로 이어진다.

소작농들의 분연한 외침은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 최후의 보루였다. 단결은 서로에게 위안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끈질긴 투쟁은, 악랄한 대지주와 일제의 부당성을 무너뜨렸다. 일제의 통치방법을 시정케 하는 큰 힘으로 작용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그런 끈질긴 힘에서 연유하였다. 그 항쟁의 힘은, 추포∼암태 간 노둣돌을 놓았던 백성들의 끈끈한 공동체 의식과 강인한 끈기에서 발원된 것은 아니었을까?

태그:#암태도소작쟁의, #추포노두길, #문재철, #저미곡가정책, #식민지 소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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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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