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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 작가의 신작 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 발췌한 이 문장이 지난 한 주 대한민국 소셜 미디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구절이 그리고 있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심시선은 천재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의 도움으로 학업의 기회를 얻었지만 그가 행사하는 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마티아스를 떠나려 한다. 그러자 마티아스는 보란 듯이 자살을 택하고, 전 유럽은 심시선을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로 몰아간다. 
  
정세랑 소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소설 "시선으로부터"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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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인용한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 

정세랑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예술계 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화제가 됐던 '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소위 남성 예술가의 '뮤즈'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폭력을 은폐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사일 터다. 그러나 이 다음부터 이야기가 향하는 경로는 우리의 예상을 비껴간다. 일견 비극적인 마티아스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집요하고 무성한 억측에도 불구하고 심시선은 예술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간다.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심시선이라는 예술가의 거대함을 묘사하기 위해, 정세랑은 그가 남긴 족적의 거대함을 스케치하는 방법을 택한다. 매 장의 서두에 그가 남긴 글, 강연, 인터뷰 등을 배치하고, 자손들의 회고를 통해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여러 일화와 생각들을 심어 놓으면서 심시선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결혼 생활도 비극이나 신파와 거리가 멀다. 두 차례의 결혼으로 얻은 3녀 1남을 중심으로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안정적인 모계 가족을 구축한 것이다. 이야기는 '쉽지 않았을 해피엔딩'을 활짝 열어젖혀 보여준다.

만약 내게 이 소설의 장르를 분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 않고 '페미니즘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심시선처럼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비'면서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밀려나지 않고 마침내 '일가를 이룬', '예술계 내 성폭력 생존자'인 여성 예술가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세랑은 심시선이라는 '예술계 내 성폭력'의 성공적인 생존자를 가상함으로써 현실 세계에서의 생존자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성폭력 피해 전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해당 분야의 베테랑으로서 뿌리내릴 수 있다는 것. 당연해야 하지만, 전혀 당연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정세랑은 이 소설에서 픽션의 힘을 빌려 당연하게 보여준다. 피해자를 넘어, 그 이후의 삶을, 성공적인 생존자로서의 삶을 상상하고, 구현한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리라. 때로 픽션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만큼, 현실의 추악함이 사무치기에.

현실과 문학이 조응하는 순간이 항상 달콤할 수는 없겠지만, 정세랑의 문장이 원래의 맥락과 상관없이 자기실현적으로 구현되고 만 것은 역사가 만든 슬픈 우연이다. 그러나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자살, 그 이후 피해자를 향해 물밀 듯이 쏟아지고 있는 2차 가해의 물결은 소설 속의 살풍경한 후폭풍과 많이 닮아 있다.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일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가 7월 11일 오전부터 서울시청앞에서 운영되어 시민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가 7월 11일 오전부터 서울시청앞에서 운영되어 시민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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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했던가. '모든 죽음은 한 세계의 종국'이라고. 그러나 어떤 세계의 종국이 다른 세계의 파국을 불러올 때, 나아가 어떤 세계의 종국이 다른 세계의 파국을 목적으로 할 때, 그리고 한 세계의 종국을 기리고자 함이, 다른 세계의 파국에 기여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심시선의 삶은 존재하지 않지만, 박원순의 죽음은 선명하게 존재한다. 픽션 바깥,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이다. 피해자는 심시선처럼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는커녕, 항상 '진정한 피해자'로 살아갈 것을 강요받으며 삶으로부터 밀려나기 십상이다. '성폭력 생존자'라고는 하지만, 그냥 '생존'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반면 가해자는 어떠한가? 우리는 권력형 성범죄로 대법원으로부터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의 모친상에 정권 실세들의 조화와 조문이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자살한 박원순의 장례식은 어떠했는가? 약 60만 명의 반대 청원에도 5일장,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러지지 않았던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폭력은 여전히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개념에 이름 붙일 언어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아랫세대들이 그려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심시선의 손녀인 화수와 지수는 할머니를 기억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 모든 걸 꿰뚫어 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은 할머니는 몰랐을 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 선이 다르잖아."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발이란, 공기처럼 퍼져 있던 위력을 폭력으로 명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언어를 찾아가는 것이다. 심시선의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안희정을 고발한 김지은이 있고, 박원순을 고발한 A가 있고,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수많은 연대자들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많은 소셜 미디어 이용자들은 이 문구를 공유하며 성폭력 피해 경험을 풀어놓기도 하고, 고발자와 연대한다는 메시지나 해시태그를 남기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문학이 현실과 조응한다는 것은 비록 항상 달콤한 경험은 아니지만, 다른 세계로 탈주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문학이 세계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결할 때 우리는 아직 가져보지 못한 것, 미래의 윤리를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가능성이요 힘이다. 그런 관점에서 <시선으로부터>는 꽤 성공적인 작업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세계는 이전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므로.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은이), 문학동네(2020)


태그:#박원순,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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