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4 18:56최종 업데이트 20.12.0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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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병원에는 니들이 갔다 와라."
"그게 무슨 말씀이여. 당사자인 아빠가 가야지."
"수술하지 않을 건데 가면 뭐 하냐. 공연히 열만 받다가 오겠지."


서울 큰 병원에서 받은 종합검진, 정밀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송강호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아이 씨X! 뭐 이래! 뭘 조심하라든지 뭐 어떻게 하라 이런 것도 없이 당뇨라고 하면 끝이여..."

정밀검사 결과를 놓고 서울 큰 병원의 암 전문의는 분명 '수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라고 할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3분 진료로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 앞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었습니다.

"아니 위를 통째로 잘라내야 한다. 그걸로 끝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 내겐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디. 그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그런 말 밖에 못하는 겁니까? 뭐 이런 X같은 경우가 다 있어!"

화를 내는 것은 암환자에게 독입니다. 어차피 수술을 거부한 나는 그 분노의 독배를 마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사에게 물어볼 몇 가지 질문 요지를 챙겨 두 아들만 보냈습니다.

크기 3센티, 진행성 중기위암 최종 판정

서울 큰 병원에 갔던 두 아들이 영어로 된 종합검진 결과서를 내밀며 의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역시 의사가 사무적인 어투로 '다른 방법이 없다. 수술이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빤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수술을 위한 뭔 검사를 또 해야 하고 20여 년 전, 축농증 수술을 위해 엑스레이를 찍다가 발견돼 그대로 멈춰 있는 폐의 작은 혹(용종?) 같은 것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축농증 수술을 했던 대학병원에서는 폐에서 발견된 혹이 암 덩어리일 가능성이 있다며 조직 검사를 권했고, 조직검사 도중에 문제가 생겨도 병원 책임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직검사를 하다가 자칫 폐에 출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암 덩어리도 아닌데 폐출혈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조직 검사를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매일 같이 산에 올라 단전호흡과 더불어 명상과 기혈운동을 했습니다. 수술을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보다 사망할 가능성이 더 많은 폐암일지도 모르는데 팔자 늘어지게 산에 올라가 명상이나 하고 있으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를 각별히 챙겼던 작은 형님이 호흡기 전문의 권위자를 찾아내 진료 예약까지 해놓았습니다. 그 전문의는 조직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며 한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씩, 검진 날짜를 늘여나가며 폐에 생긴 혹의 진행 상태를 검사했고 1년 후에도 그대로 멈춰 있어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때 만약 조직검사를 하다가 폐에 손상을 입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한 각서 때문에 아무런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고생깨나 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정밀검사를 통해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영문으로 된 기록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행 암이며 그 암 세포 덩어리의 크기가 3센티 정도 된다는 것과 2기인지 3기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배를 갈라 봐야 알 수 있다는 것. ⓒ 송성영

 
어쨌든 종합검진 결과 20년 전 그대로인 폐의 혹을 수술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번째 정밀검사를 통해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영문으로 된 기록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행 암이며 그 암 세포 덩어리의 크기가 3센티 정도 된다는 것과 2기인지 3기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배를 갈라 봐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연요법을 선택한 내가 가장 우려했던, 식도로 전이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만약 식도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면 수술을 고려해야 했는데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나머지 검사 결과는 신장 결석을 제외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다름없이 대체로 양호했습니다. 병원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죽음을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다

수술 거부와 동시에 죽음을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자 온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윗돌 하나를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몸이 그 어느 때보다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가벼운 숲 속 산책에서 만나는 온갖 생명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말을 걸고 싶을 정도로 모든 생명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누군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 할 정도로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온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생기가 솟아났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어느 순간 난데없이 이순신 장군의 말이 떠올라 또 한바탕 와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짐짓 면역세포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천길 벼랑 끝에서 죽을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더 이상 암세포에 밀리지 말 것을.
 

가벼운 숲 속 산책에서 만나는 온갖 생명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말을 걸고 싶을 정도로 모든 생명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 송성영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온 암세포에 맞선 나의 배수진은 수행자들의 계율과 다름없습니다. 옛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행자가 목숨을 걸고 자비행을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계율을 지켜나가듯 나 또한 목숨을 걸고 암세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율이 필요 했습니다.

그 계율은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온몸의 기혈을 풀어주는 기혈운동. 그리고 술 담배를 끊고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 맵고 짜고 탄 음식과 발암물질,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꿔나가는 것입니다(명상, 기혈운동, 식이요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언급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나는 죽음의 사신 앞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끌어안고 숲속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꿔 놓고 있는 암 덩어리야 말로 가혹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탐진치(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냉철하게 마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 극과 극은 통하듯이 내 안의 무자비한 암세포는 인정사정없이 수행자를 탐진치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는 혹독하고 가혹한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결혼 전, 사랑과 자비심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해가며 한때 수행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파계승처럼 한 여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내가 품은 마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실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내렸던 사랑과 자비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절실하고 간절하게 안겨왔던 것입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암세포가 그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을 혹독하게 직시해가며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혈기왕성, 한창 젊었을 때조차 목숨 걸지 못한 수행자의 길을 암 세포가 주었던 것입니다. 이만한 스승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가운 바람을 끌어안고 숲속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꿔 놓고 있는 암 덩어리야 말로 가혹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송성영

 
주화입마

솔숲에서 기혈운동과 명상을 하고 기분 좋게 산막에 돌아왔는데 큰 아들 인효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빠,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뭘?"
"수술 받는 거."
"그 얘길 또 왜 꺼내. 너희들도 아빠 생각에 공감한다고 했잖아."
"수술 안 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대. 수술 거부한 암환자 만 명 중에 한 명이 살아남을까 말까 하대. 그리고 수술 안 하면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뇌까지..."
"누가 그래?"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 분이었습니다. 그는 수술을 거부한다는 나의 SNS 글을 접하고 그 결정이 걱정되어 큰 아들 인효에게 넌지시 전화를 걸어 수술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의사로서의 소견을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의도와 다르게 겨우 아버지의 선택에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는 녀석들에게 두려움과 갈등을 심어주었고 부질없는 희망까지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 아저씨는 아빠가 걱정되니까..."
"나도 그 아저씨 맘 모르는 게 아닌데, 이제 그 얘기 그만하자."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눔 자식이! 맘 심란하게 그만해! 앞으로 그런 전화는 받지도 말고 받았어도 아빠한테는 얘기 하지 마! 니들이 그런 마음 내려놓지 못하면 아빠는 더 힘들어. 아빠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당장 산막에서 나가! 주화입마라고 어떤 것에 집중할 때 옆에서 자꾸만 딴 소리하면 오히려 독이 되니까."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화입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상이나 온 마음을 집중하고 있을 때 어떤 외부작용으로 인해 몸속의 기가 뒤틀려 호흡 곤란 등 몸과 마음이 큰 혼란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큰 아들에게 버럭 화 낸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다시 솔숲 길을 걸었습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만물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가득했는데 그 마음자리가 한 순간 이슬방울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숨고르기로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나자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아비에 대한 두 아들의 태산 같은 걱정과 슬픔과 고통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녀석들이 불쌍하고 내 자신이 불쌍했습니다. 태어나면 죽어야만 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가련하고 불쌍하게 다가왔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죽음에 대한 그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로소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암환자, 나약한 생명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바싹 다가왔습니다.
 

숨고르기로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나자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아비에 대한 두 아들의 태산 같은 걱정과 슬픔과 고통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 송성영

 
빛을 삼킨
영롱한 이슬방울로 왔다가
한 순간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너와 나
본래 하나이거나 없음을

2018.겨울 생명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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