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사키병원 전경
 사사키병원 전경
ⓒ 동국사

관련사진보기

 
군산은 개항(1899년 5월)과 함께 신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대 의료 역사는 개항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봄 의료선교사 드루(Drew)와 전킨(Junkin) 선교사가 수덕산 해안가 봉우리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진료를 시작한 것. 1906년에는 지금의 구암동산에 진찰실, 수술실, 입원실(18병상 온돌방) 등을 갖춘 야소병원 건물을 신축한다.

군산 최초 개업의는 일본인 가다끼리(片桐)로 전해진다. 그가 1900년 봄 조계지 내에 '가다끼리 진찰소'를 설치한 것. 개항기 군산에는 1904년 동경의학 전문학과 출신 '도쓰가요 시이지'가 개업한 '붕운당 병원'과 1906년 가을 '사사키'가 군산 거류민지회 보조금을 받아 개원한 '사사키병원(佐佐木病院)' 등이 있었다.

 
1934년 12월 현재 군산 부내 병원 통계표(출처 ‘군산부사’)
 1934년 12월 현재 군산 부내 병원 통계표(출처 ‘군산부사’)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일제가 발행한 <군산부사>(1935)는 당시 군산에 10개소의 치과와 13곳의 현대식 병원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중 도립군산의원, 군산병원, 중도의원, 곡본의원, 지전의원, 고교의원, 겸전의원, 단야안과의원, 장강의원 등은 일본인, 사은당치과의원, 안동의원, 새창의원, 동화의원 등 네 곳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930년대 군산 지역에는 구암병원(야소병원), 도립군산의원(군산의료원 전신), 자혜의원(개정병원 전신) 등 세 곳의 현대식 병원이 있었다. 그중 구암병원은 서양선교사, 군산도립의원은 조선총독부, 자혜의원은 일본인 대농장주 구마모토(熊本)가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 소작인 가족의 질병 치료를 위해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군산 최초 조선인 개업의는 정순문씨

 
오긍선 박사가 근무했던 군산 구암병원 모습
 오긍선 박사가 근무했던 군산 구암병원 모습
ⓒ 전킨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군산에서 처음 진료를 시작한 조선인 의사는 오긍선 박사로 전해진다. 그는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07년 귀국하여 군산, 광주, 목포 등지 예수병원(야소병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운영하였지 개업의는 아니었다.

아래는 군산의 현대 의료 역사를 정리한 책자 '군산시 의사회 제2호'(2005년 발행) 연혁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으로서 군산에 개업하신 최초 의사는 <군산시사>에 의하면 '육기병'씨로써, 이분은 1874년 서울 출생이며 한학자이기도 하였으며 다년간 약방을 경영한 적이 있는 검정의 출신으로 추측되며 1920년 옥산의원을 개업하였고 1935년 사망하셨다."

책자는 육기병(陸夔炳)을 군산 최초 개업의로 기록하였다. 이어 1916년 대판의대 졸업 후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근무하다가 1920년 지금의 죽성동에 안동의원을 개원한 권태형(權泰亨), 군산영명학교(특별과)와 경성세브란스의전(연세의대 전신) 졸업 후 의사 시험에 합격, 1924년 중앙로 2가에 세창의원을 개원한 강세형(姜世馨) 순으로 소개한다.

 
1937년 6월 19일 치 ‘조선일보’에 소개된 정순문씨
 1937년 6월 19일 치 ‘조선일보’에 소개된 정순문씨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기자는 지난 2011년 '군산의 서양 의료사'를 <오마이뉴스>에 5회에 걸쳐 연재한 적이 있다(관련 기사: 일본 의술 과시용으로 지어진 군산 자혜의원 http://bit.ly/YRte1w). 그 후에도 관련 자료를 계속 수집하였고, 정순문(鄭順文)씨가 군산 최초 개업의임을 밝혀냈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정순문씨는 전남 목포영명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목포야소병원(木浦耶蘇病院)에 초빙되어 몇 년 동안 조수(助手)로 임상연구(臨床硏究) 실적을 쌓은 다음 1916년 봄 거주지를 전북 군산으로 옮겨 '군제병원(群濟病院)'을 경영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군제병원은 군산 지역 조선인 병원으로는 효시였다. 따라서 많은 조선인에게 믿음과 희망을 안겨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정씨는 1918년 연말 개인 사정으로 이리(익산)로 이전 개업하였고, 1920년 12월경 병원을 폐원하였다. 정씨는 이듬해(1921) 봄 다시 군산으로 돌아와 영정 2정목(평화동)에 영신양복점(永信洋服店)을 개업, 사업가로 변신한다.

정씨는 1931년 4월 4일 오후 군산 명월관에서 열린 좌담회에 전학교비평의원(前學校費評議員) 자격으로 참석한다. 그는 "일본인에게는 상공조합(商工組合)이 있고 중국인에게는 상무회(常務會)가 있어서 그들은 하시를 물론하고 자기네들 이익을 위하여 가장 유의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 그런즉 조선인 측에도 그러한 조직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정씨는 적성야학교 돕기 공연 성금과 국내외 피란동포 및 불우이웃돕기 음악회 동정금을 자주 냈으며, 군산유아원 이사, 군산동부금융조합 전형위원 및 평의원, 학교비평의원(學校費評議員) 등을 역임하는 등 사회 활동도 활발히 펼친 것으로 나타난다.

그동안 묻혀있던 개업의 및 의료시설들

 
군산시 개복동에 있었던 인제의원(출처: 조선일보)
 군산시 개복동에 있었던 인제의원(출처: 조선일보)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기록에 따르면 1914년 12월 현재 군산에는 사립병원 3곳, 의원 2곳, 산파 4곳, 약종상 8곳이 있었으며 의사는 의학사 1명, 의사 6명, 의생 2명과 간호부 3명, 약제사 2명이 있었다. 당시에는 의사를 의학사, 의생 등으로 분류해서 칭하였으며 약사는 약제사, 간호사는 간호부라 하였다.

1925년 4월 12일 군산부 구복동 식도원(요릿집)에서 '군옥의생회(群沃醫生會)' 창립총회가 열렸다. 당시 군산·옥구 지역 의생은 30여 명으로 그중 18명이 참석하였다. 임시의장 이긍식 씨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회장 강기영(姜祈永), 부회장 이긍식(李兢植), 간사 박창현(朴昶鉉) 김창문(金昌文) 김공진(金共珍), 평의원 조홍집(趙弘集) 외 4명이었다.

일제강점기(1920~30년대) 발행된 신문 광고에서 소화통(중앙로 2가)의 박제의원(博濟醫院), 영정(영동)의 한호의원(韓湖醫院), 개복정(개복동)의 인제의원(仁濟醫院) 등의 개인병원이 새로이 발견된다. 그중 박제의원 원장은 김윤곤(金允坤), 한호의원 원장은 서희순(徐熙淳), 인제의원 원장은 이장희(李章熙)였다.

치과도 개복동의 이민오치과(李敏五齒科: 원장 이민오) 소화통 2정목(중앙로 2가)의 유치과(劉齒科: 원장 유시중) 구복동(개복동)의 군창치과(群昌齒科: 원장 이희서) 대정동(중앙로 2가)의 동양치술원(東洋齒術院: 원장 유태형) 영정(영동)의 경성치술원(京城齒術院: 원장 유광성), 영정의 중앙치과(中央齒科: 원장 정동진) 등 여섯 곳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군산 외곽, '면'단위 마을인 지경(대야)에도 삼성당의원(三省堂醫院), 지성당의원(至誠堂醫院) 등 두 곳이나 있었으며, 이웃인 임피에서도 제생의원(濟生醫院)이 발견되어 놀라웠다. 그중 대야 삼성당의원 원장은 군산영명학교와 경성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최주현(崔周鉉), 지성당의원 원장은 김형식(金亨植), 임피 제생의원 원장은 이한영(李漢永)이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서양선교사들이 설립한 영명학교와 경성세브란스의전 출신 개업의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새롭게 발견된 개업의와 의료시설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조선인 생활상과 의료 환경 수준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인문학적 관심과 연구 중요성이 절실히 느껴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군산시 의사회(책자)', 1920~193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태그:#일제강점기 , #군산, #개업의, #의료시설
댓글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