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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사림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사림들의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기자말]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활동한 지방 세력으로 호족(豪族)이 있었다. 호족은 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지방의 토착세력이라 할 수 있는데 왕건(태조)은 호족연합정책으로 고려를 세울 수 있었다.

호족은 고려 초 983년(성종2) 이직(吏職)개혁에 따라 호장(戶長)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 토호적 성격을 띠고 독자 세력을 유지하던 호장세력 역시 중앙 집권화 정책에 따라 독자성을 상실하고 지방통치 체제에 흡수되어 지방관의 사용인(使用人)이 되었다.

그런데 지방관(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에서는 호장이 직접 그곳의 행정을 전담했으며, 수령이 파견된 주현에서도 부세(負稅)나 역(役), 호구(戶口) 등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호장 직은 소수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이들은 지방의 지배계층으로 과거에도 응시할 수 있었고 지방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한마디로 그 지방에서 가장 실세의 권한을 가진 계층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 초 해남지역의 실세 정호장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을 비롯 해남의 대표적인 현인 여섯 사람을 모시고 있다.
▲ 해촌사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을 비롯 해남의 대표적인 현인 여섯 사람을 모시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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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이 태어난 해남은 1437년(세종19) 무렵에야 지방관인 현감이 파견되었다. 그러면 현감이 공식적으로 파견되기 전 해남지방은 어떻게 통치되고 있었던 것일까? 조선 초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호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호장은 또한 향리의 역할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향리가 있었다. 고려시대 향리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지역의 토착세력이 향리역할을 하고 있어 행정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해남은 영암군의 속현으로 현감이 파견되기 전까지 해남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것은 해남정씨(海南鄭氏) '정호장'이었다. 당시 해남정씨는 해남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부호이자 향리로서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남읍에 현 치소가 정해지고 해남읍성이 축성되는 시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해남정씨는 해남 일대에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호장 정재전(鄭在田)은 해진군(海珍郡)으로 진도와 해남의 행정구역을 통합한 1412년(태종12)에 관아와 객사를 건립하는데 물자를 지원하여 이로 인해 향역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해진군이 다시 나뉘어 독립할 때에도 노비 62구를 바쳐 향역을 면제받을 정도로 당시 경제력과 해남사회의 위상이 컸다.

해남정씨(정호장)는 이처럼 막강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권한을 지역의 인물들이 학문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똑똑한 인물은 직접 사위로 삼아 이들을 가르친다.

이들은 또 해남정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해남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인 해남윤씨 윤효정( 1476~1543) 역시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딸과 아들이 똑같이 분배받는 남녀균등분배 재산상속 원칙 속에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는다. 윤효정은 이러한 경제적 기반 아래 아들들을 잘 가르쳐 관직에 진출하게 함으로써 명문사족의 기반을 닦게 한 것이다.
 
해남정씨는 조선초 호장직을 유지하며 현감이 파견되기 전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집안이었다.
▲ 해남정씨(초계정씨) 묘역 해남정씨는 조선초 호장직을 유지하며 현감이 파견되기 전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집안이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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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문인석이 마치 마을앞을 지키는 입석처럼 친근감 있게 느껴진다
▲ 해남정씨 묘역 문인석 오래된 문인석이 마치 마을앞을 지키는 입석처럼 친근감 있게 느껴진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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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정씨 정호장은 금남 최부를 비롯하여 녹우당의 해남윤씨 윤효정, 선산임씨 임수, 여흥민씨 민중건 등 여러 인물들을 사위로 삼아 이들을 후원하게 된다.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은 해남정씨 정귀감의 사위인 금남 최부의 사위가 된다. 해남정씨를 매개체로 한 이들 재지사족들은 서로 혼맥과 학맥을 이루며 관계를 이루는데 이들 집안은 모두 학문을 일구고 관직에 진출하여 결국 사림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유계린은 아들 유성춘과 유희춘을 낳고 잘 가르쳐 이들이 중앙의 관직에 진출 학문과 문장가로서도 16세기 사림의 대표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유희춘의 형인 유성춘은 일찍 죽었지만 귤정 윤구, 신재 최산두와 함께 호남3걸로 불리 울 정도로 학문이 출중하였다.

호장집안인 해남정씨의 위상은 적어도 16세기 무렵까지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감이 지방에 파견되고 호장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해남정씨 역시 향촌사회에서의 위치와 역할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해남에는 해남정씨라는 본은 없어지고 초계정씨로 남아있는 정도다.

해남을 문향 고을로 만든 금남 최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해남지역 향촌사회는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림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풍이 불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해남은 비록 남쪽 끝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16세기 무렵이 되면 이러한 분위기로 크게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사림의 대표 인물이자 <금남 표해록>의 저자이기도 한 최부(1454~1504)가 해남에 온 뒤 부터였다.

해남정씨 정호장이 가장 먼저 후원한 인물은 금남 최부였다. 최부가 해남으로 오게 된 것은 처가살이라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당시 결혼 풍습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 금남 최부를 비롯하여 윤효정, 유계린 등이 모두 처가 고향에 자리를 잡은 인물들로 이러한 '남귀여가혼'은 일반적인 풍속이었다.

당시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분배받는 '남녀균등분배'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처의 고향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해남정씨가 최부를 비롯 똑똑한 인물들을 사위로 삼은 것은 나름대로의 높은 안목이 있어서일 것이다.

금남 최부는 나주로부터 해남으로 이주해 와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어 해남에 터를 잡은 인물이다. 그는 해남에 이거해 온 후 해남지역에 기반을 두고 여러 인물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의 학문적 가르침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게 된다. 이를 통해 해남은 16세기 무렵 사림정치기를 주도 할 만안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금남 최부를 시작으로 하여 석천 임억령(1496∼1568), 미암 유희춘(1513~1577), 귤정 윤구(1495∼?) 뿐만 아니라, 곧 이어 국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고산 윤선도(1587~1671)로 이어지는 인물들이 해남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 중앙관계에 대거 진출하게 된다.

해남에는 해남을 대표할만한 현인(賢人)으로 여섯 사람을 일컬어 '육현(六賢)'이라 칭하고 있다. 이들은 금남 최부,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귤정 윤구, 고산 윤선도, 취죽헌 박백응으로 이들 대부분이 16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사림정치기의 인물들이다.

특히 금남 최부는 사림정치기의 대표적인 인물로 해남을 일약 '문향의 고장'으로 이끈 인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미암 유희춘은 이러한 시대에 외조부인 금남 최부로 부터 학문적 계보를 이어받아 해남고을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된다.

태그:#호족, #호장, #해남정씨, #금남 최부, #유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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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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