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12월 말이라니...'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오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신음한 2020년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라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 대중문화들이 많은 힘을 줬을 듯한데요. '2020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에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순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테넷> 포스터

<테넷>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올해는 유난히도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연초부터 팬데믹이 본격화되면서 삶의 기쁨이었던 극장 나들이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나의 유난스러운 극장 사랑은 코로나도 막을 수 없었기에, 꼼꼼하게 마스크를 챙겨 쓰고 치열하게 극장을 다녔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코로나가 여름이 돼도 물러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영화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방구석 1열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은 세계 최대 스트리밍 사이트 넷플릭스를 통해서였다. 작년부터 구독했던 넷플릭스를 올해는 거의 옆에 끼고 살았고,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무궁무진한 넷플릭스 월드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일 년을 버텨왔고 그 안에서 울고 웃었다.
 
하지만 코로나 정국에 극장 문이 닳도록 나를 이끈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이었다. 3주 남짓 동안 극장에서만 5번이나 관람을 했던 영화는 <테넷>이 처음이었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는 극 중 대사가 무색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던 영화도 없었다. 왜 나는 갖은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750분을 보낸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코로나 시대에 N차 관람이 필수였던 이유
    
 영화 <테넷> 스틸컷

영화 <테넷>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테넷>은 한 테러 조직이 키예프의 오페라하우스를 급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아무런 정보 없이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를 만난다. 미션을 행하던 그는 생포되어 고문을 당한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자살용 알약을 삼키지만 이것은 스파이로서 자질을 가늠하는 테스트였다.

가까스로 깨어나 '테넷'이란 비밀단체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조직은 미래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정체불명 존재와 싸우고 있는 중이었고 주도자는 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미래 전쟁의 승리자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은 돈, 명예가 아닌 '시간'이다. 미래에서 인버전기술이 개발되어 사물의 엔트로피가 역행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를 위해 조력자 닐(로버트 페티슨)과 열쇠를 쥔 캣(엘리자베스 데비키)과 함께 샤토르(케네스 브러너)의 악행에 맞서 인류를 구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를 본 건지 멍한 상태로 극장을 나왔다. 정리되지 않는 서사와 결말이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 봤다. 세 번째부터는 아이맥스 카메라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 봤으며, 네 번째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사운드를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은 팬심으로 봤다. 지속적인 N차 관람으로 금쪽같은 시간을 잃어버렸지만, 영화를 왜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벗어나 오롯이 영화 속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집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오직 극장만의 최적화 시스템이 <테넷>에서 충족되었다. 그야말로 <테넷>은 극장에서 봐야 되는 극장용 영화였다.
 
이 기분은 <테넷> 관람전 예열을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을 아이맥스관에서 보며 느닷없이 찾아왔다.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영화는 계속해서 나올 텐데, 다 못 보고 죽을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울컥했다. 기발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관계망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스릴과 감동은 스케일이 커지고, 기술력도 날로 좋아질 텐데. 문득 삶의 유한성을 실감했다.

놀란 감독의 모든 것이 집약된 종합선물세트
  
 영화 <테넷> 스틸컷

영화 <테넷>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열한 번째 연출작 <테넷>은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다. 스파이 액션 영화이자, SF, 블록버스터, 에코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놀란의 영화는 우주, 시간, 공간, 꿈, 기억 등을 소재로 한다. 그 중에서도 '시간 왜곡'은 놀란의 트레이드 마크다. 영화의 프레임과 러닝타임 안에서 가능한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들어 시간을 쥐락펴락한다.

거꾸로 가는 총알과 움직임의 비주얼 쇼크부터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며 한 화면에서 세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시간 왜곡,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기존 영화와는 차별화된 기법이다. 즉, 시간을 시각화했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시간이 수많은 교차와 왜곡을 거치며 흘러갈 거라 상상했다. 때문에 <테넷>은 <인터스텔라>에서 협업한 물리학자 '킵 손'에게 자문해 오류를 최소화했고, 본인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매우 독창적인 시도가 여러 번 나온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시간의 교차 서사는 물론이고, 회전목마처럼 생긴 문을 돌아 나와 빨강, 파랑 방에서 벌어지는 인버전, 어디서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타임라인이 관객의 모든 감각을 빼앗는다. 사물의 엔트로피를 반전시켜 대칭적인 시간을 묘사했다는 놀란은 언제나 리얼리즘을 강조한다. 그래서 CG가 아닌, 실제 촬영에서만 얻을 수 있는 현장감이 깊게 배어 있다.

중요한 점은 CG를 최소한으로 한 아날로그적 촬영 방법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실제 촬영 장소를 물색했고, 놀라울 정도로 멋진 장면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작은 것도 허투루 만들지 않는 완벽함. 이게 바로 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는 단단한 놀란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지점은 현세대와 미래 세대가 생존을 걸고 벌이는 갈등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이 망가진 지구, 생존을 위해 미래 세대는 과거를 조작해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 아직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찾지 못했고 오직 해법은 한 가지, 지구 초기화라 믿는다. 복잡한 이야기를 돌고 돌아왔지만, 의외로 메시지는 단순하다 못해 명확하다. 지금 우리가 조금씩만 노력하면 후손도 잘 살 수 있다는 믿음. 빌려 쓰는 지구에서 인류세의 사명은 불가피하다는 일종의 경고다.

과연 미래를 예견하기라도 한 걸까, 다음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영화가 우리 곁에 존재하는 한 놀란은 계속해서 영화를 통해 기쁨을 줄 것이다. 다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잠시 멈추어 있을 뿐, 놀란의 창작 공장은 다시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테넷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