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3 14:19최종 업데이트 21.01.23 14:19
  • 본문듣기
이승만의 핵심 조력자는 미군정과 더불어 한국민주당(한민당)이었다. 식민지 한국의 특권층들로 형성된 한민당은 지금의 국민의힘보다 훨씬 더 기득권층과 가까웠다.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미군정은 일제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재산을 신한공사에 귀속시켰는데, 이 귀속재산(남한 총재산의 80%)의 약 61%를 1953년 말까지 행정관료·관리인·한민당원들에게 불하하였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재산의 61% 중 상당 부분이 한민당원들에게 불하됐다. 이 정도면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기득권층이었다고 볼 수있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국민의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한민당의 재산 덕분에 혜택을 톡톡히 본 인물이 있다. 이승만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한국 정당 정치사>는 1948년 당시 법무부 장관인 이인의 글을 인용해 "한민당은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부터 그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데다 그의 노선을 절대적으로 추종해왔다"라고 한 뒤 "그가 대통령에 피선되기까지 가장 전위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한민당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 소재 고려대학교. 대학본관과 인촌 김성수 동상.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렇게 이승만을 열렬히 도운 한민당을 이끈 지도자 중 하나가 고려대와 동아일보 설립자인 김성수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직후인 1945년 12월 29일 신탁통치 반대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가 우파 행동가 한현우에 의해 다음날 새벽 암살된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당수) 송진우에 이어 1946년 1월 7일 제2대 수석총무로 선출된 김성수는 한민당의 당력을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배신과 망신이었다. 이승만 집권기에 삼양그룹이 위축되고 삼성그룹이 떠오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김성수는 이승만과 척을 지게 되면서 집안의 삼양그룹이 과거의 영광을 잃게 됐다.

일제에 적극 협력

지금의 전북 정읍시 고부면 등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에 김성수는 만 3세였다. 그는 고부면과 가까운 지금의 전북 고창군에서 1891년 10월 11일 출생했다.

1908년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입학하고 1910년 와세다대학에 들어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이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김성수는 국내로 돌아온 다음, 크게 세 가지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의 인생사를 보면, 24세 때인 1915년에 중앙학교를 인수한 일이 1932년 보성전문학교(훗날의 고려대) 인수로 이어지고, 26세 때인 1917년에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한 일이 1919년 경성방직 설립인가로 이어지고, 28세 때인 1919년에 동아일보 설립을 주도한 일이 1920년 동아일보 사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그가 20대에 시작한 교육·섬유업·언론업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적지 않지만, 그가 뿌린 것들은 꽤 오랫동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20대에 했던 또 다른 일은 정반대 결과로 이어졌다. 만 3세 때 이웃 고장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과 무관하게 그의 인생이 흘러갔듯이, 20대에 했던 또 다른 일과도 무관하게 그의 삶은 흘러갔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28세 때 있었던 일 중 하나를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규정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전쟁범죄를 자행할 때 그는 적극 가담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본군국주의를 위해 돈을 기꺼이 쾌척했다. "같은 해(1937년)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라고 위 책은 말한다. 그는 식민지 한국인들을 전쟁에 총동원하는 데도 앞장섰다. 1938년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가 되고 1941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가 됐다.
 

인촌의 '학병권유' 칼럼 인촌 김성수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43. 8. 5)에 기고한 학병 권유 관련 칼럼 ⓒ 매일신보

 
또, 청년들을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내보내는 데도 한몫했다. 1943년 8월 5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글을 기고해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되었다면서 지난 오백 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해 11월 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에서는 한국인들은 뒤늦게라도 책무와 의무를 다해 일본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내세웠다. "일본인은 3000년 동안 의무를 수행하여 권리를 얻었지만, 조선인은 단시일이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랫동안의 희생에 필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라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배신과 망신
 

인촌 김성수 ⓒ 인촌기념회

 
이 같은 경력을 거쳐 해방 뒤 한민당 지도자가 된 김성수는 민중의 열기에 힘입은 친일청산이 정치 질서를 바꾸지 못 하도록 하고자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제휴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이기는 하지만 친일청산과 민족통합에 열의가 없었던 이승만과 합작해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지켜내기 위함이었다.

김성수와 한민당은 그 목표를 십분 성취했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거의 그대로 차지했고, 협력자 이승만을 경무대 주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성수는 배신과 망신을 당해야 했다. 1948년 정부수립 당시의 헌법 논의 과정에서부터 이런 일이 두드러졌다.

이때 '건국헌법이 제정됐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정부수립 당시의 헌법 전문(서문)은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에 선포됐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에서 임시헌법이 제정됐으므로 1948년에 만들어진 것은 건국헌법이 아니고, 1948년에 있었던 것은 '제헌'이 아니었다.

바로 이 해에 만들어진 헌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김성수는 배신과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처럼, 1945년 8·15 해방 이후의 보수 기득권층도 대통령 후보를 낼 만한 여력이 없었다. 친일청산을 저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런 분을 지도자로 모시자'라며 내세울 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민당은 1948년 헌법을 의원내각제 헌법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승만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들이 내각을 점유해 국정을 이끌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구상은 이승만의 야심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승만은 얼굴마담이 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김성수와 한민당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장에 나타나 '내각제는 안 된다, 대통령제가 좋겠다'라며 분위기를 깨곤 했다. 1948년 6월 21일에는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그러한 헌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라고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자신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한민당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2006년에 <역사학보> 제189집에 실린 유수익 연세대 석좌교수의 논문 '이승만 국회의장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에 따르면, 헌법기초위원들이 깜짝 놀라 이승만 자택인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이화장으로 찾아가 내각제의 장점을 설명하자 이승만은 "이 사람아,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라며 "그러나 대통령이 뒷방 영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야"라고 면박을 줬다.

이승만을 얼굴마담 또는 뒷방 영감으로 만들려던 김성수와 한민당의 계획은 실패하고, 이승만이 원하는 정부형태를 담은 헌법이 1948년 7월 17일 공포됐다. 이 정도만으로도 김성수는 큰 실패를 겪은 셈이지만, 그의 실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7월 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이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2009년 <동양정치사상사 연구> 제8권 1호에 실린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김성수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정부수립 당시 김성수의 위상에 관한 내용이다.
 
한민당 쪽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은) 선거 후 이승만이 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기정사실로 가지고 있었다. 한민당의 영향력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한민당이 기여한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기대였다.
 
하지만 그 당연한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성수가 자신의 총리 임명을 전제로 한민당원 6명의 입각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6명 입각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혀 엉뚱한 사람을 총리로 지명하는 뜻밖의 조처를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한 것이다.

이윤영이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하자 이승만은 광복군 출신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김성수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한민당을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위협할 수도 있는 김성수를 그런 식으로 밀어낸 것이다.

김성수를 당황케 하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뒤이어 이승만은 김성수를 총리도 아닌 일반 장관에 임명하려 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게다가 우남(이승만)은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하고 한민당 의원들은 각료 구성에서 모두 배제했다. 한민당 지도부는 이승만이 김성수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김성수 자신도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김성수가 재무장관직을 거절하자 이승만은 이번에는 무임소 장관을 제안했다. 별다른 역할이 없는 자리를 주겠다는 수정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제안은 김성수가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이승만이 자기 세력 확충에 열의를 쏟도록 하는 계기도 됐다.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이승만이 지방 토착 세력과 신흥 상공인을 중심으로 결성한 새로운 정치세력은 "한민당의 친일 보수세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고, 특히 지방에서 좌익계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지방의 친일 부르주아지들이 그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해방 직후에 친일청산을 방해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세력이 이승만의 인적 기반으로 충원됐다. 김성수 및 한민당과의 갈등이 이승만에게 그 같은 새로운 길을 열어준 셈이다.

김성수는 명망이나 인지도에서는 이승만에게 뒤졌지만, 조직이나 재산 같은 정치적 자원에서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승만에게 배신과 망신을 당한 것은 그와 이승만의 정치력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 자신의 약점에 적지 않게 기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20대에 시작한 교육·섬유업·언론업의 기조는 거의 그대로 유지한 반면, 역시 20대에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의 기조는 지켜내지 못했다. 이는 그와 한민당이 해방 뒤에 기득권을 지키는 데는 성공하면서도 경무대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하게 되는 유력한 원인이 됐다.

민중들이 친일파의 득세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그렇지만 친일파가 대통령이 되는 '꼴'을 그냥 좌시할 만큼 민중의 역량이 낮은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친일파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켰기에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해방정국 하의 친일파들은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다.

이런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김성수와 한민당이 이승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김성수와 한민당은 이 일로 뜻밖에도 배신과 망신을 당하고 야당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