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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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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정보망이 통신시설을 통해 더욱 촘촘해지고, 곳곳에 꽂힌 첩자와 밀정이 득실거리는 만주는 이제 예전 독립운동의 성지가 아니었다. 봉오ㆍ청산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특히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23년 최운산은 일제 군경에 검거되었다. 검거 장소와 날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일본경찰 수명을 사살했다는 혐의였다. 

최진동ㆍ최운산ㆍ최치홍 형제는 자유시 참변으로 수많은 동지를 잃는 절망을 딛고 북만주로 돌아왔다. 3형제가 함께 북만주 일대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독립군부대를 건설했고 새로운 터전을 다졌다. 삼동지방에 땅을 사고 다시 사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위기가 닥쳤다. 1923년 최운산 장군이 일제에 검거되어 3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최진동 장군도 얼마 후 옥고를 치렀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최진동 장군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부하의 만류를 뿌리치고 봉오동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에서 체포당했다. (주석 3)


최운산은 봉오동전쟁 이후 신분을 숨기기 위해 철저하게 변장을 하고 활동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거나 할 때는 항상 큰형 최진동을 앞세웠다. 하여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이름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바꿔 사용하였다. 

사업을 할 때는 만익(萬益), 장작림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책임졌을 때는 문무(文武), 러시아령에서 활동할 때는 고려(高麗), 봉오동 개척 시절에는 풍(豊)과 빈(斌) 그리고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 재기 시절에는 문무(文武)라 칭하였다. 선후가 뒤바뀐 경우로 있었고, 그밖에 이명과 가명도 함께 썼다. 무장독립운동가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고육책이었다.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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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투옥한 사실을 일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러던 중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그 일부를 보도하였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비밀을 일제정보자료나 일본의 신문을 통해 알게 되고, 인용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무장단의 괴수(魁首), 8년 징역에 불복항소, 함북 온성군 유포면 하탄동 최문무와 동군 남면 북창평 최태여, 두 명은 지나 간도 도독군부의 주요 간부로 만 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집한 사건으로 청진지방법원에서 최문무는 징역 8년 최태여는 징역 오년의 판결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는데,

이제 그 사실을 물은 즉 최문무ㆍ최태여 두 명은 모두 극단적 배일사상을 품고 대정 8년에 지나 간도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가서 그곳 독군부에 가입하여 부하 650여 명의 무장단을 거느리고 독군부 수령으로 있는 최명록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최문무는 모연대장 최태여는 재무부원으로 임명되야 혹은 공모 혹은 각각 나누어서 수십여 명의 무장한 부하를 인솔하고 권총, 장총, 폭탄 등을 휴대하고 간도 일대로 횡횡하며,

대정 8년 11월부터 작년 십일월 중순까지 촌리의 부호를 협박하고 전후 십여 차례에 합계 9,272원을 강탈하였고 그중 대정 9년 9월에 일본 관헌의 토벌대가 간도에 주둔하게 되매 그들은 모두 노령 방면으로 가서 의연히 조선독립운동에 노력하다가,

작년 9월에 다시 간도로 가서 일본관헌의 경비상황 조사와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다가 검거된 것이라는데, 이들과 같이 사십 명의 무장단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만 원이란 거금의 군자금을 강탈한 사실은 드물게 보는 큰 사건이라더라. (주석 4)


기사에 나오는 '무장단의 괴수' 최문무는 최운산이고, '재무부원' 최태여는 최진동의 아들, 최명록은 최진동을 말한다. '부호를 협박' 운운은 일제의 상투적인 언론보도문이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를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할 때이면 항일투쟁의 사실보다 '부호 협박' 등 파렴치범으로 몰았다. 

최운산은 조카와 함께 검거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받고 악명 높은 중국 동삼성 길림감옥에서 복역하였다. 39세에 구속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주석
3> 최성주, 앞의 책, 158쪽. 
4> 『매일신보』, 1925년 3월 30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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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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