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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아트홀이 영화를 상영하던 1997년 여름, 고3 학생의 눈에도 <브레스드 오프>란 영국영화는 꽤나 충격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영국에 도입한 '철의 여인' 대처 총리의 폐광 정책에 맞선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그 이후로도 오래 잔상에 남았더랬다.

그건 회사 측의 불합리한 횡포에 맞서 제 권리를 찾아 투쟁을 벌이는 영국의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특히 실업급여로는 만족을 못하는 영국 노동자들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1995년에 도입된 실업급여제도 자체가 생소한 때였다. 물정 모르는 고3 학생이라 그랬던 걸까.

영화 속에서 실직과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꼬박꼬박 급여를 지급하는 현실이, 그것만으론 살 수 없다고 외치고 결국 단결에 이르는 영화 속 노동자들의 모습이 별세계 이야기처럼 보였다. 우리 노동자들도 1980년대 사북탄광에서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실제 현실 속 탄광 노동자들은 대처의 강경책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럼에도 대처리즘에 질린 당시 영국 관객들은 이 영화에 환호를 보냈다. 그랬을 거다. 마치 자기 얘기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시 고3인 내 눈에도 사회를 추동하는 것은, 진보하게 만드는 일은 어떤 '상상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잔상으로 남았더랬다. 기존의 관성이나 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지금, 여기의 틀을 깨트릴 수 있는 전복적 상상력 말이다.

"치열한 경쟁, 사치스러운 생산과 소비, 사회 불균형 등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 나태한 의식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적이고 생태학적인 전환을 통해 돈에 대한 숭배를 끝내고, 생명과 존엄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난해 부활절 메시지 중에서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코로나19 시대,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그런 전복적 상상력을 통해 팬더믹 이후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지난해 전 세계 사회운동 단체에 보낸 부활절 메시지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의 보장'을 촉구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바로 그 기본소득이란 전복적 상상력을 제일 거세게,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하고 있는 이재명 경기지사. 그가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시대의 새로운 가치로 교황께서도 제안한 기본소득'이란 제목의 글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다시 길어 올렸다.

이제 막 출간된 <오마이뉴스> 최경준 기자의 <이재명과 기본소득>(오마이북)을 읽은 터라,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 지사가 주창하는 '기본소득'론이 더 둔중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저 세기말을 통과하던 고3 학생에게 어떤 전복의 상상력을 눈뜨게 해 준 영국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이재명과 기본소득>과 마주하는 일은 그렇게 동시대 코로나19 팬더믹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한국사회가 모색해야 할 대안을 상상케 하는 즐겁고도 유의미한 경험이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지켜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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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을 읽고 나자, 즉각 이런 상상이 두둥실 떠올랐다. <기생충> 속 삼수생 아들이 청년기본소득을 받았다면 영화의 결말은 조금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그 삼수생은 과외를 하러 가지 않았을까. 또는 이런 의문. '기생충' 가족에게 기본소득이 개인당 얼마씩 돌아갔다면, 봉준호 감독은 적어도 집 안에서 와이파이를 찾아 헤매는 첫 장면은 구상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가족 모두가 부잣집에 기생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기생충'들끼리의 쟁투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람 생각, 처음엔 다 비슷하다. 취재 현장에서 20년 간 활동해온 최 기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책의 시작, "영화 <기생충>의 기우와 기정이 청년기본소득을 받았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냄새로 계층을 나누는 사회가 아니라 그 냄새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생의 사회로 이끌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라는 전제를 제시한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영화 <기생충> 한 장면.
ⓒ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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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질문이 곧 상상력의 출발이다. 최 기자가 천착하는 근본 질문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매일 마주하는 질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4차 혁명 등 전 세계가 급변하는 가운데,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지켜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방점이 찍힌다. 좀 더 쉽게, 적어도 경제적 불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이재명과 기본소득>은 우선 언뜻 거시적으로 보이는 이 명제가 우리를 놀라게 한 불행한 사건사고의 근본 원인임을 분명히 한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의 원인은 '빈곤의 덫'과 '복지함정'에서 비롯됐다. 택시운전사의 유서는 공유경제의 그림자요, 인공지능 시대가 가져올 근미래의 풍경이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으로 조명된 하청노동자의 차별과 불평등 역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실업과 고용 불안정과 무관하지 않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재명과 기본소득>은 그 시작이 기본소득이라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개인에게,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는 기본소득의 다섯 가지 요소를 두고, 누구는 최악의 '예산 퍼주기'라 반대할 테고, 또 누구는 꿈같은 얘기라며 비현실성을 지적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최 기자가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타진한 기존 이론들이나 기본 소득을 실험한 실제 해외 사례들을 쉽고 부지런히 소개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증세'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이 일삼는 준비된 자포자기를 막기 위한 예방주사라고나 할까.

'위드 코로나' 시대의 현 단계를 분석한 것도 같은 맥락일 터. 최 기자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노동의 종말'이 코로나19 팬더믹 상황에서 가속화 될 것이란 전망과 함께 지난해 우리 역시 비켜갈 수 없었던 전 세계에서 흔들리는 고용안전망과 심하게 타격을 받은 사회‧경제적 수치라는 갑갑한 현실을 먼저 진단한다.

그러자, K-방역의 기틀이 됐던, 그러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프리랜서와 특수고용자들이, 취약계층이 부족하다 아우성치는 정부의 가계지원과 긴급재난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미 기본소득 논의의 한복판에 당도했고, 국민 모두가 일정정도 기본소득을 체험하고 있으며, 발상의 전환을 이뤄내고 있다는 사실을 최 기자는 각종 사례들을 통해 일깨운다.

그렇다면 이 위기 끝에 발견한 소중한 체험을, 그에 녹아든 당면 과제를, 미래의 일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를 위해 당장 어떤 정책들을 주목하고 어떤 사회‧경제적 가치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결국은 돈의 배분, 자본의 배분 문제입니다. 이걸 누가 가질 거냐의 문제에서 그동안 보통 국민들은 소외됐던 거예요. 그러면 그럴수록 부를 독점해왔던 사람들이 신경이 날카로운 거예요. 보통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권력은 돈이 있어야 유지됩니다. 이 돈을 독점해왔던 사람들이 불안한 거예요." - 최배근 건국대 교수, 8일 <김용민tv> 인터뷰 중

이재명 지사는 자꾸 그 돈을 독점해온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자꾸 그들과 싸운다. '전투형 노무현'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소년공 시절부터 체험해온 인생여정이,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 시절이, 행정가로서 보수정권의 복지정책을 반대해온 경험이 지금의 대선후보 이재명을, 기본소득 전도사 이재명을 만들었을 터.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력엔 별반 관심이 없다. 누가 내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그 풍족한 삶을 저해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이를 위해선 누구에게 표를 줘야 하는가, 에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최 기자도 잘 안다. 이 지사가 성남시와 경기도에서 벌인 일종의 실험을 통해 시민들에게, 도민들에게 인정을 받고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건 당면한 현실이다. 그래서 더 이 지사의 정책과 철학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하면 도민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게 할까, 이런 것이었지만 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면 실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논리를 만들고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경제정책이다. 기본소득이 자영업자에게 훨씬 효과가 있지 않나. 내용이 바뀐 게 아니고 포장이 조금씩 바뀐 것이다." - 이재명 지사, 본문 218p

<이재명과 기본소득>은 한국의 버니 샌더스를 자처하는 이 지사의 기본소득론이 과연 타당한지, 어떤 철학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찬찬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청년기본소득을 필두로 그간 '이재명식 정책'들을 돌아보고 이를 한국 전체의 사회‧경제상에 대입하며 이를 통해 코로나 시대를 넘어 기본소득이 가져올 '아름다운 세상'을 모색한다.

동의할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돈을 독점해왔던 (자본)권력에 설 것인가, 이들과 달리 다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의 가치를 모색할 것인가. 이 지사의 정책홍보물이 아니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이재명과 기본소득>은 이런 결론을 들려주는 듯하다.

무상급식도 처음엔 빨갱이 좌파의 포퓰리즘이었다. 누군가의 상상력이, 해외의 좋은 사례를 한국에 이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이를 한국형으로 발 딛게 만드는 실천이 그 포퓰리즘을 우리의 일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경제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 지사가 부단히 싸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등은 가난한 사람을 골라서 주자고 주장한다. 조선일보가 정말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골라서 주면, 세금을 내는 사람은 혜택을 못 받는다. 심지어 세금을 내는 사람과 안 내는 사람 사이에 싸움이 난다. 조세 저항의 힘으로 세금을 내는 쪽이 이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동의하면, 세금을 내는 소수가 거절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반대하는 쪽에서는 소수만 혜택을 보는 선별 지급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실현 가능성이 있다. 기본소득이야말로 모두가 동의하는 정책이 될 수 있다." - 이재명 지사, 353p

이재명과 기본소득 - 피할 수 없는 미래, 당신의 삶을 상상하라

최경준 (지은이), 오마이북(2021)


태그:#이재명과기본소득, #이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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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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