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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점심메뉴 : 나른한 햇살, 따뜻한 차 한잔, 그리고 책 한 권
▲ 점심시간 오늘의 점심메뉴 : 나른한 햇살, 따뜻한 차 한잔, 그리고 책 한 권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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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사람?"

오전 11시 30분, 팀장님이 묻습니다.

"저는 약속 있어요."

짧은 대답 뒤 생략된 말은 바로 '저랑요'. 네. 오늘 저는 제 자신과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 팀장님과 식사를 하기 싫어서 꺼낸 핑계가 아니에요. 정말로 제 자신과 오붓한 점심시간을 가지기로 벌써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답니다.

점심시간의 소중함이야 말해 뭐 하겠어요.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무리 반복되어도 지겹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 바로 점심시간이지요.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더욱 특별합니다. 일과 중 업무로부터 공식적으로 해방되는 딱 한 시간. 다가옴이 즐겁고, 무한정 머물고 싶고, 사라짐이 아쉬운, 마치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시간입니다.

부서를 옮길 때마다 점심시간의 풍경도 조금씩 달랐어요. 마음 맞는 동료들과 맛집을 찾아다니며 매번 새로운 메뉴에 도전하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던 때도 있었고, 구내식당에서 오로지 식사를 위한 식사 후 휴게실에서 그야말로 휴식을 취하던 때도 있었어요.

어떻게 보내든 점심시간은 좋았습니다. 상사분들 취향 따라 내키지 않는 메뉴를 먹어야 하는 날조차도요.

워킹맘이 되고 하루가 부쩍 짧아졌지만, 점심시간은 여전히 그대로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육아휴직 기간에 아이가 남긴 이유식을 아이가 깰까 봐 숨죽여 먹던 것과 비교하면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엄마와 직장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시간이지요. 아무리 여유롭다 한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밀린 빨래나 설거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희소성이 높을수록 가격은 비싸지지요. 워킹맘이 되어 맞는 점심시간은, 직장인이기만 할 때의 그것보다 훨씬 값지고 소중합니다. 기분 내키면 퇴근 후 맥주 한잔, 수다 한판 즐길 수 있던 과거의 우리와는 입장이 다르거든요. 타지 생활 중이라 저녁이 여유로운 팀장님과도 입장이 다르고요. 점심시간이라고 다 같은 점심시간이 아니지요.

팀원들과 마주 앉아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메뉴를 먹으며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 다른 속도를 배려하며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딱 한 시간짜리 자유이용권을 쓸 만큼 간절한 일은 아닙니다. 저는 바이킹도 좋아하고 귀신의 집도 좋아하는데 팀장님 따라 매번 회전목마를 탈 수는 없어요.

저는 따로 먹겠습니다

12시. 신데렐라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자 직장인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시간.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엘리베이터 안, 두세 명씩 조를 이룬 사람들의 시선이 이따금 제 손에 들린 책에 머물러요. 매번 따로 먹겠다면서 늘 혼자인 저를 '쟨 뭐 하는 애지' 하고 보는 시선도 때때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워킹맘이 되고 좋은 점 하나는 남들을 덜 의식하게 된 거예요. 내가 쓸 수 있는 마음의 총량은 정해져 있나 봅니다. 아이와 업무에 쓰는 마음이 커지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게 돼요. 옳지 않은 일이 아니면 상대방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아도 될 용기, 점심시간을 통해 만들어질 연대를 포기할 용기가 생깁니다.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도 중심을 단단히 잡으려면 주변 사람들이나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 내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해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회사 근처 샌드위치 가게로 향합니다. 도보로 5분 안에 닿을 수 있는 곳이에요. 편한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세트를 주문합니다.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동안 주로 남편과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를 해요. 함께 살고 있지만 대화할 시간은 늘 부족하거든요.

관심 가는 키워드를 검색하거나 기사 제목을 훑기도 해요. 그러다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가 놓이면 천천히 먹으며 책을 읽습니다. 유튜브를 보거나 쓰다 만 글을 고치기도 해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합니다.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시간. 뭘 하든 (하지 않든) 즐거워요. 시간을 묶어두고 싶을 만큼요.

하루 1시간, 한 달이면 20시간입니다. 미니시리즈 하나를 정주행 하고도 남을 시간, 영화를 열 편 볼 수 있는 시간, 책을 4~5권 완독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한 달 20시간이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하려던 새로운 취미를 가지기에도 충분합니다. 초등학교 아들 둘을 키우는 직장선배는 매주 화요일 점심시간마다 김밥을 가지고 골프레슨을 받으러 다녀요. 친한 후배 하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피부관리를 받고요.

마음에게 물어보세요. 한 시간짜리 자유이용권이 생기면 어떻게 쓰고 싶나요? 매일같이 약속이 있냐고 묻는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이제는 정중한 거절을 연습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허공에 대고 습관적으로 주문하는 것들 있잖아요. 딱 한 시간만 쉬고 싶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향 맡으며 멍 때리고 싶다. 누구누구랑 폭풍수다 떨고 싶다 하는 것들이요. 나중으로 미뤄뒀던 그 일들을 점심시간으로 가져옵니다. 그리운 사람을 회사 앞 단골 음식점으로 불러요. 대신 점심값은 내가 계산하면 되지요.

오전 내내 열심히 일했고, 오후에도 정신없이 일하겠죠. 저녁까지도 바쁠 예정이고요. 이렇듯 시간에 쫓기는 우리에게 내용물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가능합니다.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걸 하며 보낼 수 있어요. 저녁이 있는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점심시간이라도 사수하자고요.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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