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8 18:44최종 업데이트 21.02.1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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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미국과의 무역전쟁, 미·영·호주 등의 압박에도 기죽지 않고 끊임없이 역사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을 상대로도 끊임없이 도발을 가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자국에 대한 국제적인 포위 전선에서 한국이 빠져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도 역사 문제에서만큼은 한국을 빼놓지 않고 압박한다. 미국의 공세 때문에 홍콩 및 신장·위구르와의 역사적 연고를 단단히 하기에도 벅찰 지금 시점에, 중국인들은 한국과의 역사분쟁에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가 국민들의 SNS 활동에 개입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자국민들이 일으키는 역사분쟁을 중국 정부가 모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년 11월에는 모바일 스타일링 게임의 한국 출시를 기념해 한복 아이템을 내놓은 중국 기업 페이퍼 게임즈가 이 문제로 한국인들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이 게임을 보면서 '한복은 명나라 의상'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이 항의하자, 페이퍼 게임즈는 한국판 서비스를 즉시 종료함으로써 자국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 회사는 한(韓)복을 한(漢)복이라 하지 않고 한(韓)복이라 했다 해서 한국인들의 접속을 차단해 버렸다.

12월 말과 올해 1월에는 김치 논쟁이 있었다. 중국인들이 김치도 중국 음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의 김치와 중국의 파오차이(泡菜, 절임 채소)가 서로 다른데도, 김치를 파오차이에 넣으려고 했다.

2월에는 '갓도 명나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주지훈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 나오는 조선시대 갓을 보고 중국인들이 '저것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크가 제작한 '갓 지키기' 디지털 포스터. ⓒ 반크

 
쌓이면 폭발할 수도

어찌 보면 소소한 일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대한 적대 감정을 확산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역사 분쟁이 실제 전쟁에 선행하는 사례가 많았다. 실제 전쟁을 주먹 싸움에 비유한다면 역사 분쟁은 감정 싸움에 비할 수 있다. 당장에는 소소해 보일지라도 이런 역사 분쟁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더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그랬다. 이라크 내에서 '오스만제국(터키의 전신) 시절에 쿠웨이트는 우리와 같은 행정구역이었다'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고, 이런 논리가 이라크 정부의 걸프전쟁 개전에 활용됐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에도 그랬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당서>의 개정판인 <신당서>의 고구려 열전에는 고구려 침공 전에 당 태종이 장안성 원로들을 모아놓고 "요동(만주)은 옛날에 중국 땅이었다(遼東故中國地)"라고 연설했다고 나와 있다. 태종은 '요동은 중국 땅'이라는 자국 백성들의 역사 인식을 명분으로 삼아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고자 그렇게 했다. 역사분쟁이 더 큰 사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 국민들이 툭하면 역사 분쟁을 일으키는 최근 양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이 중국 정부와 학계가 추동하는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원성을 샀던 동북공정은 2007년 2월에 공식 종료됐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한국 고대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노력이 중국 내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한국에 대한 중국 대중의 태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여 '침공'하는 중국

중국 역사학계의 표적 중 하나는 부여 역사다. 부여를 부여 그대로 두지 않고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노력이 동북공정과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부여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왜곡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 주몽보다 훨씬 먼저 동명왕으로 불렸던 이 부여 시조가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하나인 황제(黃帝)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동양학> 제80집에 실린 이승호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의 논문 '2000년대 이후 부여사 연구동향과 POST 동북공정'은 "동북공정의 논조 속에서 형성된 고구려 건국신화에 대한 중국 학계의 연구 시각이 동명신화 관련 연구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라면서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한국어 논문이지만 외국어가 본문에 노출돼 있어, 이를 원문 그대로 소개하되 괄호 안에 번역문을 병기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먼저 李炳海(리빙하이)는 '夫餘神話的中土文化因子(부여신화의 중국문화적 요소)'에서 부여 신화에는 中土(중국)의 문화 인자가 많이 들어가 있고 中土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黃震云(황전윈)은 '夫餘和高句麗神話傳說與族源考(부여와 고구려의 신화·전설 및 종족적 기원에 관한 고찰)'에서 부여와 고구려를 모두 중국의 黃帝(황제)로부터 출자(出自, 기원)한 殷商(은나라)의 한 지파로 파악하면서 동명신화나 주몽신화의 주요 신화적 모티프 또한 중국의 黃帝 신화나 殷商의 신화 및 周(주나라) 시조 后稷(후직)의 신화 등에서 가져온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부여 시조 동명왕이 황제(黃帝)로부터 나왔으며, 동명왕 신화에는 황제 신화 및 은나라·주나라 신화의 요소가 들어갔다고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부여 시조를 자국과 연계할 뿐 아니라 부여의 대외 관계까지도 중국의 국내 관계로 편입한다. 부여를 독자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격하했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히 이 분야에서 다수의 연구성과를 제출하고 있는 趙紅梅(자오홍매이)의 연구는 고구려·발해사에 적용되었던 동북공정의 논조를 부여사 연구에 그대로 원용하다시피 하고 있다. 즉 부여는 漢代(한나라 시대)로부터 晉代(진나라 시대, 진시황의 진나라 아님)에 걸쳐 중원 왕조의 번속(종속)체제 내에 위치하였던 중국 동북지방의 중요한 지방민족 정권이었고, 멸망과 함께 최종적으로 중화민족의 한 구성 부분으로 융합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중국 학계는 부여 시조의 뿌리를 중국에서 찾고 부여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격하하며 부여가 중국에 융합됐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부여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해버렸다.

한국인들의 항의가 심했던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중국이, 부여사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순조롭게 '침공'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에 대한 중국 대중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부여 금와왕을 다룬 우표. 서울 중구 우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렇게 중국은 한국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허물어트리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은 부여사 연구에서 아직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부여가 어느 시기에 존재했는지, 어디서 기원해 어디로 이어졌는지 등등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부여가 흐릿하게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에 관한 학술적 성과가 미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적이 나온 게 한두 해 전이 아니다. 1880년에 출생한 역사학자 신채호도 이 문제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부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는데도 이것조차 구별하지 못한다면서 당시의 부여사 연구 수준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상고사> 제3편에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동부여·북부여를 구별하지 않고 그냥 부여라고 쓴 경우가 많다"라며 이런 상태에서는 부여사의 진면목을 회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북부여·동부여뿐 아니라 남동부여도 있었건만 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조선상고사> 제4편에서 그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 동부여가 양분됐다"라면서 "하나는 기존의 갈사나에 머문 동부여이고, 또 하나는 남방에 신갈사나를 건설한 남동부여다"라고 한 뒤 "기존의 학자들은 남동부여의 강역뿐 아니라 명칭조차 몰랐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한 지 올해로 90년이 된다. 하지만 한국의 부여사 연구는 뚜렷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고조선 연구>로 유명한 북한 학자 리지린이나 부여사에 대한 전체적 파악을 시도하는 남한 학자 송호정 등이 부여사를 어느 정도 연구해 놓긴 했지만, 일반 대중의 역사 인식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부여사를 놓고 역사 전쟁이 전면화된다면 한국은 밀릴 수밖에 없다. 부여사 연구에서 중국이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분쟁이 단순히 역사 문제로 끝나지 않고 대외 팽창에도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인들의 팽창 기운이 한국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부여사를 비롯한 고대사 연구에 한층 더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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