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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봄 에세이
▲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김봄 에세이
ⓒ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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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완전 우리 집 이야기다.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마치 옆에서 두 모녀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보수적이지만 나이가 들어도 딸을 챙겨 주기 위해 애쓰는 엄마와 진보적이지만 엄마를 이해하기 애쓰는 딸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온다. 

선거철만 되면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와 나(아들)의 반복되는 논쟁이 재현된다.

'아버지. 제발 보수는 이제 그만 찍으세요. 그러니까 세상이 안 바뀌잖아요.'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래. 진보가 집권하면 우리나라가 망해.'


아버지와 정치에 관한 대화를 하다 보면 매번 답답하고 마음이 상하고 불편했다.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체념했다. 아버지 역시 나의 정치적 견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정치적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살고 그들에게 각자 자치권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전히 나는 좁혀지지 않는 보수와 진보의 입장 차이를 극복할 방법을 모르겠다. 이런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비단 우리 집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엄마! 다 가짜 뉴스라니까. 그걸 진짜 믿는 사람이 있네, 있어. 그거 유튜브 같은 거 계속 보고 그러니까 지금 세뇌돼서 그러는 거 아냐!" 
내 목소리가 커지자, 손 여사는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들었다 말았다.
"이 빨갱이, 너도 큰일이다."
손 여사는 개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정치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겠어! 이제부터 엄마랑은 절교야."
그때, 손 여사 왈 "빨갱이 좌파 고양이는 안 봐줘."        
-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가는 수많은 가정을 상상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것은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것처럼 타협할 수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정치 뉴스를 보면 여야는 끝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내가 접한 정치권은 양보와 타협의 영역이 아니라 논쟁과 갈등이 첨예한 분야였다. 이러한 갈등 방식이 학습되어 일상에서도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책을 읽으며 돌아보았다. 나도 개별적인 정치 사안이나 논쟁의 핵심에서 벗어나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무조건 나와 다른 입장을 배척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김봄 에세이
▲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김봄 에세이
ⓒ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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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와 더욱 갈등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오래된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과거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면서 나에게 예전 방식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자식을 키워 보니 나도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었고 아이들은 내가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딸로 산 지 사십여 년이 지나고 보니, 이제야 딸의 자리와 위치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손 여사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아직도 이해 못 하는 것들이 많다. 풀어야 할 것들도 많이 있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손 여사와 나.     
-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중에서

아버지와 나 사이의 정치적 입장 차이는 내가 머릿속에 만든 가상의 국경선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다가서기보다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와 투쟁을 벌여왔다. 책에서 작가는 엄마와의 갈등에서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해결점을 발견한다. 
 
손 여사는 여전히 보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손 여사가 보수라고 해서 내가 엄마 취급을 안 할 것인가? 손 여사 역시도 내가 진보 딸이라고 해서 딸 취급을 안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보수 부모의 돈으로 자랐다. 그 돈으로 학원에 다녔고, 책을 사 읽었다. 그 덕에 나는 진보의 가치를 접했고, 진보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다르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두 손 여사 덕분이다. 그러니 엄마, 앞으로도 나를 잘 부탁해.     
-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중에서

맞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나 역시 진보적인 사람이 된 것은 보수적인 아버지의 교육과 지원 덕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땅의 수많은 보수적인 부모들이 교육을 통해 자식들을 진보적인 사람으로 키워냈다. 부모 세대는 자식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경험하지 못한 진보적인 세상을 자식들이 살 수 있도록 환경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당연히 나를 기성세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진보적이라고 생각해도 젊은 세대들은 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것이다. 중년이 된 나는 이제 젊은 세대의 진보적 가치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 세대를 보수 세대라고 비판하던 나도 이제 도전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젊은 세대의 눈에는 나는 아직 진보적인가?
시간이 흘러도 나는 언제까지 진보적일 수 있는가?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중복게재합니다.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김봄 (지은이), 걷는사람(2020)


태그:#좌파 고양이, #김봄, #걷는 사람, #고양이, #정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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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일상 여행자로 틈틈이 일상 예술가로 살아갑니다.네이버 블로그 '예술가의 편의점' 과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그림작가 정무훈의 감성워크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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