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09 07:46최종 업데이트 21.03.0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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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7일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이 진행하는 YTN '와이즈맨'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자나라 싱가포르의 이중성"이라는 제목으로 싱가포르의 어두운 면을 소개했습니다. "독재, 세습, 태형, 행복지수 꼴찌..." 반 년 이상 '이봉렬 in 싱가포르'를 연재하면서도 여러가지 이유로 가급적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들입니다.

싱가포르 관련 기사를 쓰면 매번 "싱가포르는 독재국가라서 그렇지…" 같은 댓글들이 달립니다. 그럴 때마다 사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가도 '언론자유지수' 151위인 국가에 살다 보니 굳이 민감한 소재로 기사를 썼다가 피곤해질 수도 있겠다 싶어 말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언론에서 대놓고 독재국가라고 표현하는 걸 보고 나중에 좀 피곤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에 싱가포르의 어두운 면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력한 규범 국가 싱가포르
 

YTN의 '와이즈맨'에서 싱가포르의 엄격한 법집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YTN 방송화면 갈무리

 
다니엘은 역학조사 과정에서 동선을 숨긴 코로나 확진자에게 징역 5개월이 선고되었다는 이야기로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례는 많습니다. 격리 기간에 호텔을 빠져나가 약혼자를 만난 영국 남성은 4주 구금과 62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고, 자가격리 종료를 30분 남기고 집을 나선 싱가포르 남성은 벌금 13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처벌이 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법을 위반했을 때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14일 격리의 마지막 30분을 남기고 벌어진 일이든, 불륜을 의심받을까봐 동선을 숨긴 경우든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경우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예방법)이 있지만 위반 행위가 적발되더라도 현장 계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학조사 과정에서 신상 정보를 빼고 교인 명단을 제출한 신천지 교회 관계자에게는 무죄가 선고됐고, 코로나 확산 중에도 불법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는 별다른 제재 없이 또다시 3.1절 집회를 열었습니다. 싱가포르의 법적용이 엄격한 건지, 한국의 법적용이 느슨한 건지, 어느 쪽이 더 좋은 경우인지 전 판단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니엘은 사형과 태형이 아직도 집행되는 사실도 지적합니다. 하지만 한국 역시 사형 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형 집행이 1997년이라 국제사면위원회가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했을 뿐입니다.

태형은 우리가 보기엔 미개한 형벌이지만 아직도 전 세계 30개 이상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곤장이 태형의 일종입니다. 서구와 일부 선진국에서 폐지된 형벌의 형태라고 해서 나라별 관습과 저마다의 사정은 무시하고 무조건 미개하다고 폄하할 건 아닙니다. 같은 잣대를 대자면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국왕 제도를 유지하는 영국과 일본도 미개하다고 해야 할 겁니다. 나라별, 민족별로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1993년 미국인 마이클 페이가 주차되어 있던 50대의 차량을 파손한 혐의로 기소되어 태형 6대를 선고받았을 때, 당시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처를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외국인이라고 봐줄 수는 없지만 미국 대통령의 체면을 생각해 2대를 줄여 준다며 태형 4대를 집행했습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공개적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결과적으로 태형을 막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싱가포르와 미국의 관계가 냉랭하기도 했습니다. 태형 자체는 미개하다고 볼 수 있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원칙대로 형을 집행하는 건 인정해줄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인종 비율. 중국계(76%), 말레이계(15%), 인도계(7.5%)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입니다. 여기에 영주권자와 이주노동자 등 상주 인구 200만 명의 인종을 다 더하면 세계의 모든 인종이 섞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Singapore Gov 화면 갈무리

 
이처럼 강력한 형벌체계가 도입된 건 다니엘이 방송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의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법인식이 없다 보니 질서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사를 표준화된 법과 형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습니다.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부패인식지수 세계 3위) 중 하나로 꼽히는 데는 이런 엄격한 법집행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독재국가?
 

다니엘은 싱가포르가 독재국가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3대 세습과도 비교합니다. ⓒ YTN 방송화면 갈무리

 
다니엘은 부자 나라 싱가포르가 알고 보면 독재국가라고 설명합니다. 싱가포르 독립 이후 초대 총리인 리콴유부터 그의 아들 리셴룽까지 정권교체 한번 없이 인민행동당이 집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듭니다. 그리고 앞으로 "리콴유의 손자가 권력승계를 준비 중"이라고 말합니다.

알려진 대로 싱가포르 언론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시위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정해진 장소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선거에서는 늘 집권 여당이 승리하고, 선거구 편성도 여당에 유리하게 되어 있고, 야당 의원이 선출된 지역은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싱가포르를 두고 '잘 사는 북한'이라고 하고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고도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 독재국가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판단하는 곳도 있습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서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지표로 산출한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라는 게 있습니다. EIU는 2006년부터 나라 별로 선거과정과 다양성, 정부의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 시민의 자유 등 5개 영역을 평가해 민주주의 발전수준 지수를 산출해 왔습니다.

10점 만점에 8점 초과는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국가로, 6점 이상 8점 이하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 국가로, 4점 이상 6점 미만은 '혼합형 체제(Hybrid regime)', 4점 미만은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로 분류됩니다.
 

EIU 민주주의 지수. 싱가포르의 색깔을 보면 연푸른 색입니다.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표시입니다. ⓒ EIU 보고서 화면 갈무리

 
지난 2월 2일 발표된 '2020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8.01점을 받아서 2014년 이후 5년 만에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세계 순위는 23위입니다.

싱가포르는 같은 보고서에서 6.04점을 받아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평가받았고, 세계 순위는 조사 대상 167개국 가운데 74위입니다. 멕시코, 태국 같은 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며 홍콩이나 터키, 우크라이나 등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입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한국 역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평가받았다는 걸 기억한다면 싱가포르를 독재국가라고 부르는 건 너무 심한 표현입니다.

싱가포르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원은 민주적 방식인 보통·자유 투표로 선출되고, 행정부·입법부·사법부의 3권 분립이 헌법으로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독립 이후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난 2020년 총선에 후보를 낸 정당이 11개나 될 만큼 정당 활동이 보장이 됩니다.

투표를 할 때마다 인민행동당 후보만 당선이 되는 바람에 야당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일부 의석을 배분(야당 국회의원 당선자가 12명이 안 되면 부족한 수만큼 선거에서 탈락한 야당 후보를 의원으로 선출)하는 제도까지 도입했습니다. 

최근 세 번의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지역구가 여럿 생기는 바람에 인민행동당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민 독재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인민행동당의 장기집권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위하는 싱가포르 시민들. 집회가 허가제이긴 하지만 시위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습니다. ⓒ 이봉렬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세계언론자유지수(Press Freedom Index)를 보면 싱가포르가 세계 최하위 수준인 151위인 것은 사실입니다. 신문과 방송이 이미 정부의 규제 하에 있는 상황에서 온라인 상의 의사표현까지도 규제하는 싱가포르의 가짜뉴스 규제법 '온라인상 허위정보 및 조작방지법(Pofma)'이 새로 제정되어 언론의 자유는 한참 멀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가짜뉴스와 악의적 선동 기사가 범람하여 기자보다 기레기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듣는 한국의 언론 상황이 싱가포르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와 중국어를 포함한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쓰는 상황에서 정부의 규제 하에 있는 싱가포르 매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뉴스 매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적인 매체 외에 SNS를 비롯하여 뉴스를 접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새로운 매체가 다양해진 요즘 시대에 실제로 싱가포르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언론의 자유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
 

행복지수 149위 국가. 이것만 보면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좀 다릅니다. ⓒ YTN 방송화면 갈무리

 
다니엘은 프로그램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때 싱가포르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150개국 중 149위로 평가됐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부자나라 싱가포르지만 독재 정치에 신음하는 일반 국민들은 모두 불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지만, 이건 사실관계가 다릅니다.

다니엘이 말한 행복지수 149위는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2012년 발표한 세계 감정지수 보고서(Global Emotions Report) 결과입니다. 벌써 10년도 더 된 결과이고, 그 당시 싱가포르에서도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갤럽이 조사한 내용은 단순한 행복지수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 감정을 얼마나 경험했는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갤럽의 조사는 감성지수 (Emotions) 조사였습니다. 이 지수가 행복도와 관련이 있겠지만 행복지수라 부르기에는 부족합니다. 이 조사에서 1위는 필리핀이었습니다. ⓒ 갤럽 보도자료 갈무리

 
가디언을 비롯한 대부분의 외신들은 그 조사 결과를 두고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긍정적이지 않은 나라(Singapore the 'least positive' country in the world, survey)" 혹은 "여론조사 결과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감정 표현이 적은 나라(Singapore is world's least emotional country, poll finds)" 등의 제목으로 보도를 했습니다.

일상에 대한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이 가장 적은 나라가 가장 불행한 나라일 수는 있지만 이 조사는 감정지수 조사일 뿐 행복지수 조사는 아닙니다. 갤럽의 보고서에도, 외신의 보도에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열 가지 질문 모두에 대해 "네"라고 대답한 비율이 60%로 가장 높은 순위를 받은 필리핀 같은 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 관련해서는 다른 조사가 있습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사회적 지원, 기대 수명, 사회적 자유, 관용, 부정부패 등 6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국가별 행복지수를 산출해 순위를 매긴 세계행복보고서가 그것입니다. 2020년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핀란드가 1위, 싱가포르가 31위, 한국은 61위로 조사됐습니다. 행복이 순위로 매겨질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싱가포르의 행복지수는 149위보다는 31위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 싱가포르는 31위입니다. ⓒ SDSN 보고서 갈무리

 
싱가포르는 다민족 국가이며, 코로나 이전에는 연간 방문객이 2천만 명 가까이 되는 국제도시국가입니다. 580만 인구 중에 저 같은 외국인 영주권자가 50만 명, 상시 거주하는 이주노동자가 150만 명이나 되는 나라이기도합니다. 엄격한 법집행, 수많은 벌금 제도, 과도한 규제 등은 다양한 인종·종교·문화를 가진 구성원들이 이 작은 도시 국가에서 서로 다툼 없이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안내표지판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서구가 만든 민주주의의 기준에 비하면 싱가포르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고 반드시 고쳐야 할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리콴유 전 총리가 주장한 '아시아적 가치' 위에서 나름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수십 년째 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노력이 예전의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벗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인정받는 성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독재국가라는 지적은 싱가포르와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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