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동계올림픽 3주년을 맞아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출전했던 선수들과 그해 겨울을 평창에서 보낸 이들을 만나 평창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봤습니다. '다시, 나의 평창'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평창 올림픽 때 대한민국 설상 첫 메달을 이끌어낸 '배추보이' 이상호 선수입니다.[기자말]
 이상호 선수가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린 2020-2021 시즌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활주하고 있다.

이상호 선수가 코르티나담페초에서 열린 2020-2021 시즌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활주하고 있다. ⓒ Miha Matavz (국제스키연맹)

 
고향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과정이었다. 메달 확보가 걸린 준결승에서 '어떤 선수도 이 코스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던' 블루 코스를 마주했다. 상대와의 경기에서 중반까지는 뒤처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마지막 코스를 통과한 선수는 0.01초 차이로 메달을 확보했다.

그 주인공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하루 전인 2월 24일, 설상 종목에서 한국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낸 '배추보이' 이상호(하이원스포츠) 선수다.

지난 8일, 슬로베니아에서 막바지 시즌에 돌입한 이상호 선수를 전화로 만났다. 이번 시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첫 올림픽이었던 평창 때의 추억과 1년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 물었다. 

"부상 회복에 전념... '쉼표' 같았던 이번 시즌이었어요"
 
이상호 선수는 지난 시즌 말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수술대에 오르며 시즌 아웃됐다. 그래서 이번 시즌은 경기 감각 회복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지난 시즌의 부상이 재발되지 않도록 완벽히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는데, 그 부분은 만족스럽다"라며 "'쉼표'를 찍으면서, 다시 한 번 완벽하게 준비하는 시즌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상호 선수는 복귀 시즌에 실전 감각을 되찾는다는 최소한의 목표를 이룬 것, 그리고 세계선수권 5위의 성적을 냈다는 사실에 만족을 표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 정해두었던 목표는 포디움 안에 드는 것이었다면서, "이번 시즌에는 메달 목표까지 미치지는 못했다"며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이번 시즌은 코로나19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부상 재활이 끝나고 충분히 보드를 탈 시간도 없었다. 이상호 선수는 "이번 시즌에는 보드를 1주일 정도 타고 첫 월드컵에 나갔다. 코로나19 때문에 전지훈련도 나가지 못했다"라며 "작년 11월에 유럽에 출국한 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예외 없이 14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탓에 올해는 시즌 마무리 시점까지 고향을 밟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통 시즌 중간 한 주 남짓한 짧은 휴식기가 주어지면 한국으로 돌아와 충전의 시간을 갖는데, 코로나19는 그 짧은 휴식마저 허락해 주지 않았다.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예전엔 시즌 중간 하루 정도 쉴 시간이 나면 스키장에서 떨어진 시내로 나가 한식당에서 한국 음식도 먹고, 가고 싶은 곳도 가며 컨디션을 되찾곤 했는데, 이번 시즌엔 스키장 안에만 머물러야 했단다. 이상호 선수는 "휴식 기간 내내 무료하게 지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살던 곳'에서의 올림픽, 한 달 전에야 실감했어요"

이상호 선수는 강원도 정선군 남쪽의 사북읍 출신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사북을 벗어나지 않았다. 코앞 고한읍의 눈 덮인 고랭지 배추밭을 썰매장 삼아 눈을 탔던 그는 조금 자란 뒤부터는 사북의 하이원리조트에서, 평창 휘닉스파크에서 스노보드를 타곤 했다. 사실 강원도가 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실감이 안 났다는 이 선수는 "시차 적응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라며 "그래도 사는 동네가 점점 바뀌고, 훈련을 위해 찾던 휘닉스 파크도 점점 바뀌더라. 그러면서 조금씩 실감이 났던 것 같다"라고 당시의 느낌을 전했다. 

올림픽을 1년 앞두고 그는 좋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삿포로 아시안 게임에서 평행회전과 회전까지 2관왕을 차지했고, 월드컵에서도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상호 선수는 "어린 나이에 좋은 성과를 내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희망도 생겼다"라고 소회했다. 이어 "16-17 시즌을 마무리하고 올림픽 시즌에 돌입할 때에는 더욱 완벽하게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라며 "본격적으로 올림픽을 한다는 실감이 났던 것이 올림픽 한 달 전"이라고 밝혔다. 

"시즌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올림픽 경기를 하는 베뉴를 보면서 드디어 한국에서의 올림픽을 실감했습니다. 올림픽 준비를 하려고 선수촌에 입촌했더니 올림픽에 쓸 용품하고 의복을 주더라고요. 그때 바로 '한국에서 올림픽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피니시 라인 앞에서 했던 모험, 0.01초 차 승리 만들었다
 
 평창 올림픽 기념관에는 이상호 선수가 올림픽 당시 착용했던 모든 의복과 장비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평창 올림픽 기념관에는 이상호 선수가 올림픽 당시 착용했던 모든 의복과 장비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 박장식

 
이상호 선수는 올림픽 첫 경기가 있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관중들이 꽉 차고도 남을 정도로 계셔서 (나를) 응원해줄 줄은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선수들 이름을 호명하는 걸 들으니 흥분도 되고 신이 났다"면서 "스노보드 종목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실 텐데, 보고 즐기면서 신나해 주니 힘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예선에서 3위를 기록한 이상호 선수는 16강에서도, 8강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예선 성적에 따라 블루 코스와 레드 코스 중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데, 그의 상대였던 예선 2위 슬로베니아의 잔 코시르는 주저 없이 레드 코스를 골랐다.

이날 경기에서 블루 코스는 이길 수 없는 코스로 악명을 떨쳤다. 레드 코스에 있던 선수가 DNF(넘어지는 등의 이유로 중도 포기 되는 것 - 기자 말)되지 않는 이상 블루 코스를 탄 선수가 승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호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눈밭 위에 섰다. 

"상대가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욕심부리지 말고 질 땐 지더라도 침착하게 경기하자라는 생각으로 코스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와 거리가 벌어졌는데, 막판으로 갈수록 점점 따라잡게 되더라고요. 피니시 직전에 떨어지는 턱 비슷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모험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이트에 가깝게 라인을 타는 모험을 하고, 피니시 라인에서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통과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0.01초 차이로 이상호 선수가 결승전에 진출하며 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피니시 순간 승리를 모른 채 들어왔던 이상호 선수는 전광판을 보고서야 승리를 알아차렸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들어오고 나서 전광판을 봤는데 이겼다고 나온 거예요. 이제 드디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표가 메달 색깔과 상관없이 포디움 위에 오르는 것이었는데, 그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특히 이상호의 메달은 '한국 첫 설상 종목에서의 메달'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는 "올림픽과는 거리가 멀었던 종목인데 메달을 획득하니까 더욱 많은 축하를 해주셨다"라면서도, "메달 플라자에 섰을 때에도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예선에서 조금만 더 잘 탔으면 애국가가 나왔을 텐데 싶었다"라고 아쉬워했다. 

"'배추보이'요? 아직은 잘 어울리네요"
 
올림픽 이후 변화도 적지 않았다. 휘닉스 파크는 그가 평행대회전 경기를 뛰었던 슬로프 명칭을 '이상호 슬로프'라고 바꾸었고, 평창군에서는 '이상호 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메달 획득을 기념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 2월 열린 평창 올림픽 기념관에는 그가 올림픽 당시 입었던 의복은 물론 보드, 장비까지 모두 그대로 전시됐다.

본인이 체감하는 변화는 많지 않았다는 이상호 선수는 "올림픽 직후에는 많이들 알아보시곤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평소에 알아보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스노보드 선수이다 보니까 스키장엘 가면 타는 것을 보고 '이상호 선수 아니세요?'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메달을 딴 이후에는 찾아주시는 분들도, 만나 뵌 분들도 많았다"면서도,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지만 운동선수이기에 기본적인 생활의 틀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운동선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올림픽 전과 마찬가지로 선수로서의 해야 할 일은 그대로 똑같이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상호 슬로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선후배나 가족, 친구 모두에게 자랑할 유산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물론 처음 이름이 바뀌었을 때에는 어린 마음에 쑥스럽기도 했다. 일상복 입고 리프트 올라가는데 '이상호 슬로프 가자'는 분들이 보이면 더욱 그랬긴 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상호 슬로프에서는 매년 FIS가 주최하는 평행대회전 월드컵이 열린다. 이상호 선수는 "너무 기분이 좋다. 연습을 하고, 시합을 할 때면 올림픽 때 기억도 떠오른다"면서, "좋았던 기억이 많은 곳에서 매년 월드컵을 주최해 주시는 분들께 너무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이상호를 상징하는 별명이 되어버린 '배추보이'에 대해서도 물었다. 

"촌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사실 많아요. 하지만 입에 잘 붙는 별명인데다, 제 커리어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기도 하고요. 물론 나이가 조금 더 먹으면 약간은 창피할 것 같은데, 아직은 제게 잘 어울리는 별명 같아요."

이상호 선수는 비시즌을 어떻게 보낼까? 보통 부상 재활과 치료, 그리고 사이클 같은 체력 훈련에 중점을 두지만, 다른 취미도 있었다. 그는 "서핑을 한다던가 웨이크보드를 타는 취미가 있다"면서도, "FC 바르셀로나를 좋아하다 보니까 시즌 때도 시간이 맞으면 라리가를 즐겨 본다"라며 웃었다.

"4년이라는 시간, '눈 깜빡하니' 바로네요"
 
 2020년 열린 평창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특별 장내아나운서로 나섰던 이상호 선수.

2020년 열린 평창 스노보드 월드컵에서 특별 장내아나운서로 나섰던 이상호 선수. ⓒ 박장식

 
이상호 선수는 최근 보드를 바꾸었다. 평행대회전 코스에서 지나는 게이트의 간격이 점점 길어지는 추세인데, 그에 최적화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직 보드에 완벽하게 적응하진 못했다고 한다. 더욱이 코로나19 탓에 보드를 몸에 익힐 시간이 줄어 어려움이 컸다. 그래도 이상호 선수는 "시즌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장비들이 점점 몸에 맞아가는 기분"이라며 "다음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서 더욱 완벽하게 보드에 몸을 맞추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이상호 선수는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열릴 장자커우도 2019년 열린 아시안컵과 월드컵을 통해 미리 경험해본 바 있었다. 그에게 '올림픽 슬로프'의 평가를 부탁하자 "코스 자체가 크게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시합의 난이도가 쉽지 않다"면서, "테크닉보다는 한 치의 실수 없이 타야 하는 점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난 시즌 입은 부상도 완벽히 회복했고, 장비도 내 몸에 맞아가고 있으니 베이징 올림픽 준비는 더욱 잘되지 않을까"라면서 "베이징에 가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애국가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물었다. 2021년에 떠올리는 '올림픽'과 '평창', 그리고 '올림픽 메달'은 어떤 느낌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올림픽'은... 눈 깜빡하면 다가와 있는 것 같아요. 생애 첫 올림픽이었던 평창 올림픽이 끝났을 때에는 4년 뒤가 까마득하게 멀 줄 알았는데, 막상 다음 올림픽이 다가와 있네요.

평창은 이름만 들어도, 땅 위를 밟기만 해도 언제나 기분이 좋습니다. 올림픽과 관련된 조형물을 보면 올림픽 때 기억도 많이 떠오르곤 합니다. 최근에는 제 이름을 딴 '이상호 공원'도 평창에 생겨서 스키장에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네요. 

메달은 제게 자긍심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긍정적일 수는 없잖아요. 기대했던 것보다 시합 성적이 좋지 못할 때도 평창 올림픽의 메달을 생각하면 다시 극복하고 노력할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좋은 성적, 그리고 메달이 어떻게 보면 제 뒤를 잘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스노보드 이상호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 은메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