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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한겨레 손바닥문학상 21회 대상 수상작 <한 사람이다>의 주인공 주현은 청각장애인이다. 주현의 생일을 앞두고, 그의 아빠는 인공와우 수술을 권한다. 하지만 주현은 그 제안에 선뜻 응하지 못한다. 

주현은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걸 좋아하고, 한껏 볼륨을 높여 뮤지컬 실황 공연을 보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동시에 보청기를 빼고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습관이 있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인공와우 수술은 어쩌면 '좋은 기회'라기보다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주현은 자신의 언니 주민에게 수어로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다. 
 
"모르겠어. 엄마 말 때문인지 요즘엔 전보다 소리를 더 잘 듣게 되면 어떨까 조금은 궁금하기도 한데…"

횡단보도를 다 건너 맞은편 보도에 발을 디디던 주현이 그 자리에 서서 주민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무서워.」

그 말을 끝으로 주현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소아암으로 인한 선천적 장애가 있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유지민씨는 지난해 12월, '내가 걷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링크). 그는 이 글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자신에게 사람들은 '얼른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본인은 몇년 간의 고민 끝에 스스로 '걷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설명한다. 그가 내세운 두 가지 이유는 군더더기 없이 아주 명쾌하다. "걸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걷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에.

소설 <한 사람이다>와 유지민씨의 칼럼은 모두 장애를 '결함' 혹은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의문을 던진다. 장애는 극복이나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이 이들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시각에도 반기를 든다.

두 글을 읽다보면 장애학 연구자 김도현씨가 쓴 책 <장애학의 도전>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당사자를 힘들게 하는 건 '장애' 그 자체가 아니다. 바뀌어야 할 것, 변화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장애가 사라져야만 행복하다?
 
휠체어를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휠체어를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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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가 있는 작가, 어멘더 레덕이 천착한 건 그중에서도 '동화'였다. 뇌성마비로 인한 장애 때문에 한때 휠체어를 탔고, 지금도 다리를 저는 그는 책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를 통해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이야기'에 녹아 있는 장애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파헤쳤다. 

책은 동화에 대한 그의 분석과 어맨더의 과거 경험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고 가벼이 치부하는 이 동화들이 한 사람의 삶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짚기 위해서다. '휠체어를 탄 공주'를 상상할 수 없었던 작가의 시점에서 다시 읽는 동화 그리고 고전, 디즈니 영화 등은 이전과 사뭇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대개 이야기 속에서 장애인의 존재는 아예 '삭제'된다. 디즈니 만화 영화에서 장애가 있는 공주는 아직도 등장하지 않았다. 또, 동화에서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의 장애는 극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쓰이곤 한다. 장애는 그 자체로 불행이나 고통을 의미하기도 하며, 때론 '극복'하거나 넘어야할 장벽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동화 속에서 장애, 소위 '비정상'의 상태가 사라져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서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그림 형제의 동화 <고슴도치 한스>다. <고슴도치 한스>는 아이가 없던 한 농부 부부가 상체는 고슴도치, 하체는 사람인 아들 한스를 낳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동화다.

동화 속에서 농부 부부는 한스를 부끄러워하며 7년 동안 숨겨 기르지만, 한스는 끝내 부모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며 승승장구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름대로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주인공의 서사를 담은 동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아주 전형적인 동화의 문법을 따른다.

어느 날, 한스는 숲속에서 길을 잃은 왕을 구해준다. 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딸인 공주와 한스를 결혼시키는데, 드디어 사랑의 상대를 찾은 한스는 공주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고슴도치'라는 외피는 벗어던질 수 있는 가죽일 뿐이고, 사실은 매력적인 남성 청년이라는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진짜 자신의 모습',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은 한스는 공주와 함께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오며 '금의환향' 하게 된다.  

어멘다 레덕은 이 결말을 두고 "한스가 가족과 다시 결합하고, 충분히 친절했지만 동물이었던 이전 남편보다는 사람인 지금의 남편을 훨씬 좋아하고 기뻐하는 공주의 모습에서 이야기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서사의 틀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증명해야 한다"

이처럼 장애를 '행복해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결함'으로 그리거나, 부정적인 무언가 혹은 악당의 특성이라고 묘사하는 동화의 문법은 현실 세계의 오해와 편견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장애인의 실제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장애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기게 한다. 동화에서는 주인공의 '노력'이나 '마법'과 같은 장치로 당사자가 직면한 고통과 어려움을 손쉽게 해결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누군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려움을 겪거나, 고통을 느끼는 사회를 개선할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그래서 어멘다 레덕은 "동화는 당연히 진짜 이야기가 아니"지만 "결코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고, 이제는 '다른 동화'를 상상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 높인다. 
 
... 우리는 사회가 변화기보다는 치료를 강조하는 문화를 지지하고 영속화했다. 장애인이 잘 살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장애인의 삶 자체를 말살해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서사가 말해지는 사회가 지속되게 했다. 우리가 말하는 이야기들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p.285)

더디지만, 새로운 '길'은 분명 만들어지고 있다. 영국의 어린이 시리즈 <페파 피그>에는 2019년 초부터 휠체어를 탄 캐릭터인 '맨디 마우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엔 보청기를 낀 바비 인형이나, 휠체어를 탄 레고 상품도 출시됐다. 이제 겨우, '상상 속의 세계'가 조금이나마 '현실의 세계'와 비슷해지고 있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아직 갈 길이 먼 건 사실이다. 존재를 가시화하는 걸 넘어서, 장애가 있는 캐릭터에 입체적인 서사와 다양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악당'도 '비련의 주인공'도 아닌, 그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오롯한 한 사람으로서의 서사가 담긴 다채로운 글, 그런 '이야기 이상의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들어낼 책임이 우리에겐 있다.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지만, 더 중요한 건 여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 나는 세상에 증명할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세상이 나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내 몸을 위한, 내 말을 위한, 기울어진 내 걸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줄 책임이 세상에는 있다. (중략) 나와 같은 몸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고, 이 세상을 나와 같은 몸에게도 맞게 바꾸어야 한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내가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p.313)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 이야기를 통해 보는 장애에 대한 편견들

어맨다 레덕 (지은이), 김소정 (옮긴이), 을유문화사(2021)


태그:#휠체어를탄소녀를위한동화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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