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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을 정리하다 미처 손을 대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때때로 보내주시는 매실액과 양파액 등 각종 효소들과 더덕, 인삼, 은행잎 등을 넣어 담갔다는 술 종류들이다. 약으로 조금씩 먹으라고 보내셨지만, 어떤 것은 너무 달고 어떤 것은 너무 쓰고 독했다. 챙겨 먹질 않으니 매년 새로 담가 보내주시는 것들로 베란다는 풍년이다. 상할 염려가 없으니 버리지 않았고 몇 해를 모으니 가득 쌓였다.

매년 정리되고 버려지는 것들도 있다. 겨울의 초입에 보내오는 것들이다. 동치미 무와 고추 삭힌 것, 고춧잎이나 깻잎 삭힌 것들이다. 한 계절이 지나면 입구에 하얗게 골마지가 낀다. 그것을 걷어 내고 깨끗이 씻어 양념을 하거나 따로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것들인데, 날이 더워지면 더는 해 먹을 것 같지 않아 통을 정리하곤 했다. 

한쪽 구석에서 겨우내 잊힌 재료. 조금만 부지런을 떨고 솜씨를 발휘하면 귀한 반찬이 되는 것들이지만 주부 30년 차인 내게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아직 그 진가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늘 있어서 하찮고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재료가 드디어 빛을 발했다. 베란다 한쪽 구석에 있던 소금물에 푹 삭힌 고추와 동치미 무. 그것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엄청난 양의 고기가 한꺼번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고기에 곁들일 음식을 생각해 보니

돼지 안심 1.7킬로그램, 불고기 양념 2.7킬로그램, 삼겹살 2킬로그램, 찹쌀 2인분은 족히 넘게 넣고 삶은 토종닭 백숙까지. 이 많은 것이 어느 날 어머니한테 들어왔고, 그대로 우리 집에 배송되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때나 살 만한 양이었다. 먹성 좋은 장정들이 있다고 해도, 이 많은 고기를 무사히 다 먹을 수 있는 방법은 고민이 필요했다.

순서를 정했다. 우선 익힌 것을 먹고, 다음은 양념된 것을 먹기로 했다. 익힌 것이야 끓여가며 먹으면 되니 냉장고 신세를 질 것까지는 없었다. 보내준 정성과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갖춰 마지막까지 잘 먹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정도 먹으니 백숙이 마무리됐다. 다음은 양념 불고기와 삼겹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어서 소분해서 냉장실과 냉동실로 나누어 보관했다. 물릴 때까지 한 가지만 먹을 수는 없으니 번갈아가며 먹기로 했다.

돼지 안심은 네 덩어리가 들어 있었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우선 냉동실에 두었다가 나머지 것들을 다 먹을 때까지 천천히 조리법을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 세끼, 고기가 빠지지 않는 식단이 2주간 계속되었다. 그 많던 고기가 서서히 없어지니 사람 입이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기가 많아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매일 장을 보는 고민은 덜어주었다. 시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부지런히 먹기만 하면 되고, 맛있게 먹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다만 고기와 함께 곁들여 먹을 반찬은 필요했고, 그것을 생각하다 베란다에 숨어 있던 재료가 떠올랐다. 지난겨울, 김장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매년 보내주시던 대로 풋고추를 간장과 소금에 각각 삭힌 것과 동치미 한 통을 보내오셨다. 집에 온 후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재료를 이참에 먹어보자고 생각해서 꺼내게 되었다.

먼저, 동치미 무 한 개를 짠맛을 덜어내기 위해 가늘게 채를 썰어 찬물에 담갔다. 10분 정도 지나 물기를 꼭 짜니, 적당히 짠맛에 무말랭이처럼 아삭하고 꼬들한 식감이 나왔다. 고춧가루와 마늘, 설탕, 물엿과 식초를 넣어 버무리고, 쫑쫑 썬 쪽파와 통깨, 참기름을 넣어 마무리하니 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밑반찬이 완성되었다. 새콤하니 입맛이 도는 것이 고기와도 잘 어울렸다.
 
겨우내 베란다 한쪽에 놓여있던 동치미 무를 꺼내 양념에 버무리니 무말랭이와 비슷한 꼬들한 식감의 반찬이 완성되었습니다.
▲ 무 장아찌 무침 겨우내 베란다 한쪽에 놓여있던 동치미 무를 꺼내 양념에 버무리니 무말랭이와 비슷한 꼬들한 식감의 반찬이 완성되었습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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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힌 고추도 비슷하게 양념을 했다. 소금물에 삭힌 고추도 물기를 빼고 고춧가루와 간장 조금, 조청과 참기름, 깨소금을 듬뿍 넣어 무치니 맛집에서 별미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고추장아찌 무침이 만들어졌다. 겨우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별 볼 일 없는 그것들이 양념에 따라 색다른 맛을 냈고 고기의 짝꿍으로 식탁을 근사하게 했다.
 
소금물에 삭힌 고추를 꺼내 물기를 빼고 양념을 했더니 고기랑 짝꿍이 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반찬이 되었습니다.
▲ 고추 장아찌 무침 소금물에 삭힌 고추를 꺼내 물기를 빼고 양념을 했더니 고기랑 짝꿍이 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반찬이 되었습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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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냉동실의 돼지고기 안심 1.7킬로그램만 남았다. 남은 고기로 여러 가지 조리법을 떠올렸지만, 많은 양을 단번에 해결하기에는 장조림만 한 것이 없어 보였다. 돼지고기 장조림은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음식 만드는 것에 겁을 낼 만큼 초보가 아니니 과감하게 도전했다.

해동된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끓는 물에 생강을 넣고 적당히 데쳐 잡내와 불순물을 제거했다. 다음으로 냄비에 적당히 물을 붓고, 간장, 물엿, 설탕, 맛술, 커피 가루를 섞은 양념에 통마늘을 넣어 푹 졸였다. 최근에 만들었던 음식들의 맛이 괜찮았기에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를 따라 만드니 한동안 먹을 수 있는 장조림이 완성되었다.

장조림의 짝도 삭힌 고추 무침과 동치미 무 무침이었다. 직접 조리해서 상에 올리니 예전에 친정어머니가 장독대에서 꺼내 순식간에 무쳐 따뜻한 밥과 함께 상에 내놓던 그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의 어린 입맛은 그것들의 깊은 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빛바랜 그것들은 양념을 해도, 어른들이 맛있다고 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어른의 맛이고 추억의 맛인 장아찌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음식들에 손이 더 간다. 식당에 가도 그것들이 있으면 귀한 음식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주인의 수고와 정성도 느껴진다. 그런 귀한 음식을 내가 만들어 상에 놓으니, 친정어머니의 기억까지 더해져 더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새로운 반찬을 만들어낸 뿌듯함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해서 아이들에게 풀어놓으니, 이미 다 자란 아이들은 묵묵히 들어주고 맛있다며 먹어주기도 했다.

봄과 함께 시작된 고기 파티, 그리고 겨우내 묵힌 것으로 만든 고추 장아찌와 무 장아찌 무침. 어른의 맛이고 추억의 맛이며 엄마와의 기억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베란다에서 잊히고 버려질 뻔한 것들의 가치의 재발견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맛있음을 강요당한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시장에 나가니 신선한 채소와 봄나물도 많았지만, 한쪽에 온갖 종류의 장아찌들이 막 나온 채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장아찌는 이 봄에 딱 맞는, 어쩌면 사계절 내내 식탁을 넉넉히 채울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인지도 모른다.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순무를 장에 넣으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청염에 절이면 겨울 내내 먹을 수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은 사시사철 싱싱한 제 빛의 채소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모든 재료를 오래 먹기 위해 저장한 장아찌는 조상들의 삶의 지혜였고 가난한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절이면 봄이고 여름이고 우리 식탁에 딱 어울리는 반찬인 장아찌를 올해는 버려지는 것 없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의 봄은 꽃들도 마스크를 하고 숨을 죽이며 조용히 피고 지는 것 같다. 길가의 화단에서 올라오는 새싹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삐죽 내미는 것 같다.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봄바람을 맞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모두 조용조용하다.

때가 때인지라 밖으로 눈 돌리지 않고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삭힌 것들의 맛을 발굴했는지도 모르겠다. 야단법석하는 봄이었으면 휴양지나 봄꽃 축제에 다니느라 또 잊히고 버려지고 했을지도 모르니, 코로나가 옛 맛을 찾아주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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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씁니다. 50대 후반, 남은 시간을 고민하며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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