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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비가 촉촉히 내렸습니다. 아침을 먹고 모처럼 집에서 쉬는 아들과 함께 우산을 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비를 맞고 샐쭉해진 개나리며, 이제 막 화사함을 펼쳐내기 시작한 벚꽃에, 만개한 목련 그리고 내리는 비 덕분에 한껏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개울까지 굳이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산책 후에 나누는 한 잔의 커피와 버터향이 짙은 스콘, 카페에는 휴일의 '쉼'을 나누는 가족들이 오고갑니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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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함께 차를 마신 선생님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굉장히 여유로워보인다나요. 여유라니! 이런 '단어'로 제가 보여진다는 사실 자체가 참 낯섭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제 모습입니다. 

시간 아깝게 무슨 산책! 카페에 가서 마시는 커피 값도 아깝고, 스콘은 언감생심, 그럴 돈이 어디 있어! 그렇게 살았어요. 그때보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졌냐고요? 제가 버는 돈은 그 당시에 비하면 반토막이 났어요. 이 나이 되도록 여태 집 한 칸 없이 삽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를 부립니다. 그 '여유'의 시작이 어디였을까요? '은인'을 찾자니 '코로나19' 덕이란 생각이 드네요.

우리 사회 전체가 그랬듯이 저 역시도 '코로나 19'로 인해 멈춰섰습니다. 주경야독처럼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글쓰고, 뭐 이런 식으로 숨가쁘게 달려오던 시절, 저 역시도 본의 아니게 멈춰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인들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야!'

'일각이 여삼추'인 심정으로 코로나가 종식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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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작가 우르슐라 팔루신스카의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을 보았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본의 아니게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게 된 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모는 감자를 곁들인 저녁을 준비한대요
이웃집 아주머니는 시장을 갈 거고요.
우체부 아저씨는 우편물을 날라요.

말인즉 그림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하겠다'는 걸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웁니다. 벌러덩 누워 하늘을 봅니다. 

얼굴을 덮은 신문의 알파벳 사이로, 모자 사이로 비춰진 햇살, 누워서 보는 나무, 수풀, 벌레들 등등 글로는 어찌 설명할 수 없는 풍광을 그림책은 보여줍니다. 똑같은 햇살인데 모자 사이로, 알파벳 사이로 보이는 햇살이 다릅니다. 낮부터 밤까지, 같은 하늘인데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 중력, 우리는 중력에 지배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서있거나 앉아서 시간을 보냅니다. 가끔 하늘을 보지만 그조차도 서있거나 앉은 상태에서 입니다. 막상 고개를 치켜들고 오래 보고 있기는 힘들어요. 누워있을 때는 대부분 눈을 감고 있기가 십상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세상이 바로 '중력'적 존재인 우리가 보는 세상의 '프레임'입니다. 
 
세계에 대한 의미는 인간에 의해 부과된 것이다.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정의입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세상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각자가 살아온 경험과 인지적 역량의 테두리 내에서 세상을 해석한다고 합니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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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로나가 우리가 살아왔던 익숙한 관성적 프레임을 벗겨버렸습니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일, 내가 속한 조직, 사회, 나아가 국가, 그리고 자연과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프레임' 자체로부터 우리를 '튕겨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림책 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졌지만 코로나 팬데믹에 봉착한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강제로 갖게 된 것이랄까요.

저 역시도 처음에는 늘 발을 구르던 '쳇바퀴'가 사라진 상황에 당황하여 불안과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책 속 사람들이 누워 하늘을 바라보듯, 워커홀릭에 가까운 삶에서 방출되어 본의 아니게 게으르게 되니 다른 세상이 열렸습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에는 '힘들다'는 호소가 많습니다. 남편이 이래서 힘들다. 상사가 저래서 힘들다 등등. 그런 호소인들에게 스님의 첫 번째 해답은 '정 힘들면 하지 말라'입니다. 남편이 자기 멋대로라 정 견디기 힘들면 결혼 생활을 그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상사가 힘들면 회사를 그만 두면 된다고 합니다.

스님이 때려치라고 부추키시는 걸까요? 아닙니다. 스님이 주시는 '화두'는 누구 때문이라 핑계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직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마치 제가 가정 경제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있는 양 거드름을 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정신적 부담이 버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리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지요.

코로나 때문에 강제로 생긴 '여유'로 비로소 저만의 깊은 우물에서 빠져나와 너른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인생의 반환점을 돈 초로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리 애써 무언가를 해야 할 것도 노력해야 할 것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가정 경제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더는 채워지지 않는 텅빈 하늘과 같은 제 삶이 다가왔습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저의 소회입니다. '멈춤'의 시간이 없었다면 여전히 저는 무언가를 핑계대며 자신을 다그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자신을 포장했을 것입니다. 주변을 살피는 대신 제 자신을 우물 속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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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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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LTE급의 속도로 살아왔습니다. 코로나는 그렇게 '속도감 있게 살아온 우리의 삶을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게으르게 보이는 세상>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했습니다. 잠시 멈춰서서 본 세상은 어땠나요? 장 피아제는 인간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틀을 새로이 만들어 간다고 했습니다.

공부 모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쑥쓰럽지만 환갑을 앞둔 지금에서야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뒤늦게서야 '수용'한 제 자신이 저에게 '여유'를 가져다 주었나 봅니다. 코로나로 인해 멈춰선 시간 덕택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 에도 실립니다.


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우르슐라 팔루신스카 지음, 이지원 옮김, 비룡소(2018)


태그:#게으를 때 보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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