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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거실에서 다림질하고, 아내는 안방에 누워서 핸드폰을 본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런 풍경에 혀를 끌끌 찼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스럽다. 세상에 자기 옷을 자기가 다려입는 것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오히려 누군가 평생 다려주는 옷만 입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집 풍경이 이렇게 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엔 여러가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결혼 당시 남편은 학생이었다. 다림질이 필요없었다. 일본에서 5년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양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림질이 필요해진 것은, 한국으로 돌아와서였다. 양복에 넥타이, 전형적인 회사원 복장에 셔츠를 다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의 셔츠 다리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의 일이 되었다.

남편 회사 동료의 오지랖
 
돈벌어 오는 남편의 셔츠를 아내가 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로 규정되는 순간이다.
 돈벌어 오는 남편의 셔츠를 아내가 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로 규정되는 순간이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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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도 1년 만에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셋째 늦둥이가 태어난 것이다. 막내는 껌딱지처럼 등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밥 할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하물며 남편 셔츠 다림질은 물건너 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남편은 묵묵히 사방으로 구겨진 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속마음 들킬새라 별일 아니라는 듯 툭 하고 이런 말을 던졌다.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내 구겨진 셔츠를 보고, 집에서 그 정도밖에 대접을 못 받느냐고."

별 오지랖! 그러나 당시엔 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상황이 훨씬 더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세월이 흘러 아이가 커감에 따라 육아의 고충에서 벗어났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그의 셔츠를 다시 다리기 시작했다. 내 남편도 집에서 이렇게 대접받고 살아요, 선전이라도 하듯.

어느날 피곤해서 남편에게 다림질을 부탁했다.

나 : "당신이 좀 하면 안돼?"
남편 : "그건 당신 일이잖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자는 이야기다. 돈벌어 오는 남편의 셔츠를 아내가 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로 규정되는 순간이다. 그때 그 말에 아무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군말없이 해오던 일을 그에게 미루는 것도 미안한 일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그의 회사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양복에서 캐쥬얼 정장으로. 이제는 단색 와이셔츠가 아니라 체크 무늬든 뭐든 괜찮은 거다. 체크무늬 셔츠는 다림질을 안 해도 단색 셔츠만큼 보기 민망하지 않다. 게다가 면 100%도 아니니 별 구김도 가지 않는다. 다림질 필요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다림질을 고집한다. 다림질을 하면 느낌이 다르다나. 

나 : "그럼 당신이 해."
남편 : "당신이 더 잘하잖아."


이제는 역할론도 모자라 다림질에 내가 더 재능이 있다는 거다. 당연히 내가 더 잘하지. 네 셔츠를 주구장창 내가 다렸으니. 나의 입 속 말이다.

나 : "군대에서 다림질 많이 안 해 봤어?"
남편 : "외출시에나 좀 해 본 거지. 다 잊어 버렸어."


너무 얄미워서 확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10년 전에 들었던 말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고개를 쳐든다.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 내 구겨진 셔츠를 보고, 집에서 그 정도밖에 대접을 못 받느냐고.'

여전히 나는 내 남편이 대접받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남편의 영광이 나의 영광이고, 남편의 흠이 나의 흠인 것처럼.

드디어 2019년 여름, 내 나이 50이 넘어가자 갱년기 호르몬 때문인지 뭔지 슬슬 반란이 일어났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남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이 폭발을 조금이라도 잠재우려는 듯, 주말마다 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림질은 여전히 나보고 하란다. 여기서 타협했다. 그래, 밥도 하는데 뭘. 다림질 정도야.

부부 관계에서 의심해 볼 일
 
아, 15년이다. 남편이 직접 자기 셔츠를 다려 입기까지 걸린 세월이.
 아, 15년이다. 남편이 직접 자기 셔츠를 다려 입기까지 걸린 세월이.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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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지금은 다림질도 한다.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다림질을 할 동안 내가 편히 누워 있게 되기까지, 겪었던 심리적 불편함은 지금도 기억한다.

처음에 그가 다림질을 시작했을 때,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머리로는 '당연히 네 셔츠 네가 다리는 게 마땅하지'였다. 그런데 몸은 안절부절 못한다. 뭐라도 도와야 되지 않을까. 뭐라도 코치해야 되지 않을까. 몸의 습관은 이렇게 질긴 거다.

어느날 나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남편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하니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 신경쓰지 않는다. 내일 입고 갈 셔츠가 있는지, 셔츠를 언제 빨아야 할지, 언제 다려야 할지.

아, 15년이다. 남편이 직접 자기 셔츠를 다려 입기까지 걸린 세월이. 이제 그는 집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남편이 되었다. 그런데!!! 대접받지 못하는 지금, 그는 더 행복하단다. 

남편은 대접받아야 한다? 그리고 아내는 대접해야 한다? 의심해 볼 일이다. 누군가는 대접받고, 누군가는 대접해야 되는 관계라면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내가 찾은 답이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이분법적 역할분담, #남편, 대접받는 존재?, #아내, 대접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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