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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5월 4일 내 생일날은 잔칫날인 줄 알았다. 엄마아빠가 선물을 주시고, 생일상을 차려주고, 크림이 잔뜩 올라간 흰 케이크가 개봉되고, 축하 노래와 함께 불을 후~ 불어서 끄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 나서, 주인공이 되는 날이라고.

내 생일에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내가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된 후부터였다. 첫 아이가 두 살쯤 되던 해, 나는 그 해 내 생일에 엄마에게 '낳아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손발이 오그라들 뻔했지만, 엄마 되더니 철이 들었다며 나 자신을 조금은 스스로 기특해 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다. 조간신문을 느긋하게 읽고, 쉐이빙크림을 묻혀 면도를 하는 등 꽤 여유 있게 출근 준비를 하셨던 아빠와 달리 엄마의 아침은 늘 '불난 호떡집'이었다. 아침식사 준비하랴, 대여섯 개 되는 도시락 싸랴, 자식새끼들 깨워 밥 먹이고, 옷 챙겨주랴. 하다못해 말라비틀어진 치약을 쥐어짜서 눈곱만큼 자식들 칫솔에 묻혀주는 것도, 우산을 챙겨서 보내는 것도 죄다 엄마 일이었다.

가족의 생일에 늘 성주상을 차렸던 엄마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가족의 생일날엔 두세 배 더 분주했다. 철딱서니 없었던 나는 그 분주한 공기가 싫지 않았다. 잔칫날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역국 끓이고 색다른 반찬을 준비하며 식사는 식사대로 준비하시는 엄마는 그 바쁜 와중에 성주상을 차려서 안방 한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작은 소반 위에 밥과 국, 생수, 떡을 올린 소박한 성주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왜 그 상을 차리는 것인지 궁금했고, 왜 그 안방에서 큰소리를 내면 안 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뭔가 신성하다는, 엄마가 뭔가를 진심으로 빌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 성주상 의미를 알게 되었다. 난 내 아이들 생일에 성주상을 차리지는 못했다. 미역국 끓여서 아이들 입에 맞는 반찬을 한두 가지 만들어서 상을 차리는 게 전부였다. 해가 갈수록 엄마가 내 생일에 해주셨던 그 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엄마 생신에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으로만 그쳤을 뿐 엄마 생신날 저녁에 외식을 하거나 케이크를 자르는 일로 대체됐다.
 
내 생일날, 미역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생일날, 미역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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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의 주인공

그러다 몇 달 전 엄마에게 '올해는 꼭 내가 엄마 생신날 미역국을 끓여드리겠다'고 선언하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엄마로부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내 생일보다 네 생일날 끓여줘야지. 너 낳느라 엄마가 고생했으니까."

아뿔싸. 맞다. 나는 여전히 생일은 당사자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내 생일의 주인공은 엄마다. 나를 낳느라 고생한 엄마.

며칠 전 내 생일이었다. 나는 생일 전날, 장을 봐서 엄마 집에 갔다. 가서 엄마랑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집에 와서 늘 차 한 잔만 마시고 가거나 엄마가 차려주신 밥만 먹고 바쁜 듯 황급히 집에 돌아가기 바빴다. 그도 아니면 기어이 일거리를 싸들고 친정에 오는 딸이었다.

이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 머리칼도 만져보고 엄마 손도 만져보았다. 서로 아무 말 없이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고, 엄마의 시사평론(?)을 듣기도 했다. 친척들의 옛이야기도 들었다. 아무렴 무엇을 해도 좋았다.

생일날 아침에는 미역국을 끓이고 잡채를 만들어 내었다. 엄마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잘 만드시고 음식 맛도 잘 내신다. 과정 또한 지성이다. 엄마에 비하면 내 요리는 요리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지만, 어쨌든 나도 주부 21년 차 아닌가. 진심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

지금껏 미역국을 수도 없이 끓여 봤지만 오로지 엄마를 위한 미역국은 이날 처음 끓여 보았다.

꽃을 피워내는 작약의 눈물

우리는 엄마 마당에 있는, 엄마가 키우는 작약나무를 구경했다. 작약꽃봉오리는 대추알만한 크기로 꽁꽁 싸여 있었다. 꼭 강보에 꽁꽁 싸인 아기 같았다. 작약 꽃봉오리에는 물방울 같은 게 맺혀 있었는데 엄마 말로는 송진 같은 찐득한 진물이라 했다.

꽃잎을 피워낼 때 작약은 저렇게 진물 같은 것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안쓰럽다 했다. 물론 엄마는 작약이 아니므로 정말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엄마의 감정이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기한 건 내 눈에도 작약의 진물이 꼭 진통을 하는 산모의 눈물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엄마는 작약이 꽃잎을 피우기 위해 꼭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고 말하셨다.
▲ 작약의 눈물  엄마는 작약이 꽃잎을 피우기 위해 꼭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고 말하셨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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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 나무 앞에서 엄마랑 기념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세수도 안하고 화장도 안 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엄마에게 절대 유포(?)하지 않고 소장용으로 갖고 있겠다며 허락을 얻어냈다.

생일날,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와 선물을 많이 받았다. 요즘은 SNS가 발달해서 예전에 비해 축하인사를 더 많이 받게 된다. SNS로 내 생일을 홍보하고 다닌 것 같아서 뭔가 좀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어쨌든 감사한 마음이다. 축하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내가 잘 나서 내 생일인 게 아니라 잘 낳아주셔서 내 생일을 맞을 수 있음을 떠올리며 속으로 '이 영광(?)을 엄마에게 돌립니다'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저녁 무렵, 하루를 돌이켜보며 아침에 엄마아빠에게 미역국을 끓여드린 것을 떠올리며 내심 뿌듯해 하고 기뻐했다. 이제야 온전히 생일을 잘 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생일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드린 것 같았다. 앞으로 내 생일날에는 꼭 이렇게 아침 미역국을 끓여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왜요?"
"그냥……. 어제랑 오늘 네가 있다가 없으니까 허전해서 전화해 봤다."
"애걔... 겨우 하룻밤 자고 갔는데 뭘."
"그래도 그게 아니더라... 허전하고 보고 싶구나."
"앞으로 자주 갈게요. 엄마 보러 자주 갈게. 자고 올게."


그래. 꼭 생일날, 어버이날만 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일거리를 싸서 가더라도 더 자주 엄마 집에 가서 엄마 손을 만져보고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다. 가서 엄마랑 한 이불 덮고 자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좀 더 뿌듯해진다. 생일마다 나는 조금씩 더 자라고 있다는 증거인가. 나는 엄마에게 작약의 '눈물 사진'과 함께 환하게 피어난 작약 사진을 보내드렸다.
 
진통(?)을 이겨내고 화사한 연분홍을 잎을 피워낸 작약
 진통(?)을 이겨내고 화사한 연분홍을 잎을 피워낸 작약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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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생일 , #미역국, #작약 ,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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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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