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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먼 거리 고봉이 향로봉, 왼편, 즉 북동쪽의 다소 평평해 보이는 높은 산등성이가 을지전망대다
▲ 부부소나무전망대에서 바라본 펀치볼 전경 멀리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먼 거리 고봉이 향로봉, 왼편, 즉 북동쪽의 다소 평평해 보이는 높은 산등성이가 을지전망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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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에 있는 해안면은 여의도 면적 6배에 달하는 침식분지로 한국전쟁 이후 외래어인 펀치볼(Punchbowl)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다. 짧아도 수억 년의 지질역사를 지닌 땅이니 그 땅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사연은 오죽 많을 것인가? 

해발 1100m를 넘나드는 고봉들로 둘러쳐진 땅이므로 예로부터 고립된 오지였을 것이고 그곳의 삶 역시 척박하기 그지없었을 터다. 한국전쟁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중 221일이 이곳 해안분지를 둘러싼 고지에서 벌어졌으며 이때의 사상자 수만 해도 25만 명에 달한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펀치볼(Punchbowl)이란 지명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가칠봉에서 본 노을빛 분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유리잔에 담긴 칵테일 빛과 같고 해안분지의 형상이 화채그릇처럼 보여 탄성을 질렀다는 일화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칵테일 빛은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반복됐던 전투 과정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핏물이 아니었을까?

전쟁으로 원주민들은 떠나고 이곳은 정부가 주도하는 재건촌이 되었다. 탄피와 지뢰가 널려있는 황무지에 오갈 데 없는 500가구, 1500여 명이 들어와 황폐한 땅을 일구었다. 개간 과정에서 60여 명이 지뢰 등의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랬던 곳이 이제는 '강원평화지역지질공원'이 되었고, 올 5월 1일부터는 산림청이 지정한 첫 '국가숲길'로 선정되었다. 대암산(1천304m), 도솔산(1천148m), 대우산(1천179m) 등이 머리에 구름을 이고 남북으로 11.95km, 동서로 6.6km에 이르는 분지를 감싸고 있다. 분지의 고도가 해발 400m 정도이니 높이 700m 이상의 벽을 두르고 있는 셈이다. 
 
길가에 서 있는 꽃사과나무가 일행을 반기고 있다
▲ 고용하고 평화로운 펀치볼 마을 길가에 서 있는 꽃사과나무가 일행을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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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1일 오전, 펀치볼 안으로 들어섰다. 우람하고 장대한 산성으로 병풍을 친 분지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길가에 서 있는 꽃사과나무가 일행을 반기고 길바닥에는 처음 보는 무당개구리가 나와 있었다. 

을씨년스럽던 통제지역이 일반인에게 문을 연 것은 2010년이 되어서다. 일정 구간의 지뢰를 제거해 DMZ펀치볼둘레길을 조성하였으나 여전히 지뢰의 위험이 곳곳에 있어 무조건 산으로 들어설 수 없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이고, 숲길체험지도사와 동행해야 한다.  
시계 방향으로 귀룽나무, 단풍나무와 쪽동백나무의 합체, 두릅나무, 가래나무
▲ 산길에서 만난 나무들 시계 방향으로 귀룽나무, 단풍나무와 쪽동백나무의 합체, 두릅나무, 가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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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체험지도사는 걷는 중간마다 희귀한 야생화와 나무들을 소개하고 이곳의 생활상을 알려주었다. 분지 지형의 특성상 일교차가 커 지난겨울에는 두 번이나 영하 24도까지 내려가기도 했단다. 20도 가까운 일교차는 시래기 수확에 최적인 기상 조건이므로 펀치볼은 최상질의 시래기 생산지이기도 하다.

봄인데도 펀치볼 둘레길에서 내려다본 밭 풍경은 녹색이라기보다는 파랗고 검었다. 모두 인삼밭이란다. 목숨 걸고 땅을 개척한 재건촌 주민들은 도시로 떠나고 또 다른 외지인들이 들어와 인삼밭을 가꾸고 있었다. 기후온난화로 사과와 인삼은 펀치볼의 새로운 특산물이 되고 있었다.

펀치볼 둘레길은 평화의숲길,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먼멧재길 등 총 4개 코스인데, 일행이 찾은 곳은 산길이 시작되는 오유밭길 중간 지점부터 시작하여 만대벌판길 일부 구간이었다. 
 
숲길체험지도사는 역삼각형 모양의 지레 표지판이 있는 철조망 옆 철조망 문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 펀치볼 둘레길 입구 숲길체험지도사는 역삼각형 모양의 지레 표지판이 있는 철조망 옆 철조망 문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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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입구를 통과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연녹색 오솔길이 평쳐진다
▲ 전형적인 펀치볼 둘레길 둘레길 입구를 통과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연녹색 오솔길이 평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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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은 시작 지점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숲길체험지도사는 역삼각형 모양의 지레 표지판이 있는 철조망 옆의 철조망 문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입구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연녹색 오솔길이 일행을 이끌었다.

길 양옆에는 다양한 이름을 가진 야생화가 보였다. 숲길체험지도사는 펀치볼의 야생화는 4월 중순까지가 절정기였다고 아쉬워하며 안내했으나, 나는 피나물, 우산나물, 여러 색의 제비꽃, 금괭이꽃, 독초라는 부자 등 이름만을 기억하기에도 벅찼다. 
 
시계 방향으로 제비꽃, 부자, 무당개구리, 피나물, 금괭이꽃, 구름버섯
▲ 숲길에서 마주하는 생명체 시계 방향으로 제비꽃, 부자, 무당개구리, 피나물, 금괭이꽃, 구름버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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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사이로 펀치볼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그루의 소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는 부부소나무전망대 가까이 온 것이다. 오유밭길에 있는 펀치볼 전망대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해안분지 지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쪽 편 높은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먼 거리 고봉이 향로봉이란다.

그 옛날 호수였던 해안분지의 물이 그 골짜기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분지가 되었고 인제로 넘어가는 길이 생긴 것이다. 왼편, 즉 북동쪽의 다소 평평해 보이는 높은 산등성이가 을지전망대로 펀치볼 감상에 최적지인 곳이다. 왼쪽 끝부분인 북쪽은 가칠봉으로 날씨가 좋으면 금강산도 볼 수 있다는데 우리에게 그런 행운은 따르지 않았다. 
 
전망대 뒤에 또 한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관람객 나름대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 부부소나무전망대 전망대 뒤에 또 한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관람객 나름대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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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소나무전망대를 뒤로 하고 계속 길을 나아갔다. 산길이 이어지고 두릅나무와 귀룽나무를 만나고 단풍나무와 쪽동백나무가 합쳐져 한 몸이 된 진귀한 구경도 하였다. 솔기봉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펀치볼을 조망하고 솔기봉쉼터를 지나치며 오유밭길 산행은 끝이 났다. 
 
개울물은 용늪이 있는 대암산에서 내려온다
▲ 만대벌판길에서 마주치는 개울 개울물은 용늪이 있는 대암산에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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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만대벌판길이다. 오유밭길과 만대벌벌판길이 마주치는 DMZ자생식물원에서 일행은 만대벌판길로 들어섰다. 만대벌판길은 산골짜기 개울을 건너서 시작하는데, 산 위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용늪이 있는 대암산 물이란다. 용늪에서의 감동이 되살아나며 개울물이 반가웠다.

만대벌판길은 편안한 숲길이었다. 이곳은 피나물 군락지가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으며 장희빈이 마신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는 부자도 있었다. 조금 걷다보니 100여 년 넘게 지내고 있다는 도솔산 산신제 터인 성황당이 나왔다. 도솔산 산신은 여신이라 제물로 바치는 소는 당연히 수놈이고 여자는 참여할 수 없어 제례 준비부터 제를 지내는 일까지 남자들이 도맡아 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었다. 
 
도솔산 산신은 여신이라 제물로 바치는 소는 당연히 수놈이고 여자는 참여할 수 없어 제례 준비부터 제를 지내는 일까지 남자들이 도맡아 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 도솔산 산신제 터인 도솔산 성황당과 졸참나무 도솔산 산신은 여신이라 제물로 바치는 소는 당연히 수놈이고 여자는 참여할 수 없어 제례 준비부터 제를 지내는 일까지 남자들이 도맡아 한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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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을 지나고 너래바위 쉼터를 거쳐 만대저수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만대벌판길은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나 일행은 오른쪽 만대저수지를 끼고 내려옴으로써 4시간여에 걸친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비가 간간이 뿌렸으나 시계가 맑아 전망대에서 해안분지가 어떻게 펀치볼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좀 더 이른 봄이었으면 해안면을 둘러싼 산줄기가 농도가 다른 나무색과 꽃들로 화려하지 않았을까? 가을이면 갖가지 단풍색으로 산줄기를 가득 채우지 않을까?

그때는 더더욱 펀치볼이란 지명이 실감날 것 같았다. 유리 옆면이 화려하게 장식된 고급스러운 화채그릇. 참혹한 전쟁 속에서 펀치볼이란 외래어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막상 목격하고 보니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는 딱 펀치볼이었다. 그리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현대 역사의 기록은 참혹하다. 불과 70년 전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생존해 계시다. 이처럼 "최전방 요새"였던 펀치볼은 역사적으로나 지질학적으로나 그리고 자연 환경적으로나 다채롭다.

덧붙이는 글 | 여행정보
DMZ펀치볼둘레길은 사전예약이 필수이며, 하루 200명만 탐방할 수 있다.
DMZ펀치볼둘레길 방문자센터: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해안서화로 23 / 033-481-8565
DMZ펀치볼둘레길 안내 사이트 www.dmztrail.or.kr
코스 예약(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사이트 http://komount.kr


태그:#펀치볼, #가칠봉, #대암산, #오유밭길, #만대벌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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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반 동안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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