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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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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을 비롯 서구 열강의 침투가 시작되면서 내부적으로 새로운 학문과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여기저기에 각급 학교가 설립되었다.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신규식의 아버지와 형님이 서울에서 관직에 있었기에 그의 상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갓 결혼한 신부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괴로웠지만, 당시만 해도 서울 유학에 동부인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당시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최급무의 하나는 민족문화 유산을 계승하면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새로운 근대교육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이 신지식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근대학교이므로 19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근대학교의 역할과 비중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

즉 당시 근대학교는 나라의 독립과 발전, 자주와 진보, 자주적 근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동력 기관과 같은 것이었고, 하나의 학교의 설립은 우리나라를 자주적 근대화의 길로 끌고 갈 하나의 엔진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주석 5)


서울에 올라온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정부가 1891년 설립하였다. 청일전쟁으로 폐교되었다가 1897년 5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가 각종 학교 중에 관립외국어학교를 택하고, 비교적 취업이 쉬운 영어ㆍ불어학교가 아닌 한어(중국어)를 택한 것은 다소 의외의 선택이었다. 이 학교는 견지동에 있었고 학비는 무료, 수업기간은 3년, 졸업을 하면 관리 임용의 수령장이 수여되었다. 한어는 중국인이 맡아서 가르쳤다. 

그가 한어학교를 택하였던 것은 예관이 양반(儒家) 출신으로서 이미 한학의 기초가 쌓여 있었다는 이점과, 또 관리로 임용된다고 해도 타학교 졸업자들보다 보수적인 관직에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이해된다. 만약에 서구의 언어를 배운다면 당장의 현실적인 이득은 있었겠지만, 가문전통 - 양반유가로서의 - 으로 본다면 스스로 전통을 단절하는 행동이 된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개화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또한 문중의 염원이 환로진출을 위해서는 통과해야 할 절차였기 때문에, 향리의 학습과정에서 이미 익숙해 있던 한학을 바탕으로 하는 한어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석 6)


그가 당시 별로 인기가 없는 관립한어학교에 들어간 것은 뒷날 중국으로 망명하여 유창한 중국어(한어)를 통해 손문을 비롯한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교유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와같은 미래의 원대한 목표를 갖고 한어학과에 지망한 것인지는 헤아릴 수 없으나, 신식학교에서 한어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예관이 전통적 신분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종래의 신분관으로 본다면 한어학교는(역관) 중인층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환로지향적인 문중 출신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예관이 한어학교를 입학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시기에 어느 정도 양반으로서의 자기 체질을 극복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한어학교에 입학한 예관은 중국어의 독본ㆍ서취ㆍ작문ㆍ회화 등과 함께 역사ㆍ지리ㆍ산술 등의 교과목을 배웠는데 이 같은 과목들은 그가 처음 접하는 신학문이었다. 그가 이 학교에서 3년간을 수학했다고 하나 정식으로 졸업한 것은 아닌 듯싶다. (주석 7)


그의 성장기는 사회적으로 일종의 과도기였다. 과거급제를 위한 전통적인 학문체제가 사라지고 이른바 신학문을 가르치는 각급 학교가 개설됨으로써 문화충격이 대단했겠으나 그는 스스로 또는 가문의 영향으로 전래의 신분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관립한어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있을 즈음 나라 안팎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하였다. 하나같이 '문화충격'에 가까운 일들이다. 단발령(1895년 11월)과 명성황후 살해사건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거하는 아관파천(1896년 2월), 서재필에 의해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1896년 4월), 이어서 독립협회가 창립되고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신규식과 신채호는 여기에 참여하고 간부직을 맡는다. 


주석
5> 신용하, 『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 43쪽, 문학과 지성사, 1980.
6> 임춘수, 「신규식ㆍ신채호 등의 산동문중(山東門中) 개화시기」, 『윤병석교수 화갑기념 한국근현대사논총』, 468쪽, 지식산업사, 1990.
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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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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