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5 19:40최종 업데이트 21.05.1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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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일켈(가명)은 불 꺼진 방에서 관절염이 심한 아내의 무릎을 주물렀다. 고향에서는 별로 추위를 모르고 살았다. 아내는 겨울도 겨울이지만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널뛰는 계절이면 더 으슬으슬 떨었다. 지난 4월 말, 도시가스비가 3개월이나 연체가 되었지만 방이 차서는 안 되기에 보일러를 세게 틀어야 한다.

마이일켈이 떠나온 땅 서남아시아,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있는 그 곳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쫒겨가면서 종교문제가 불거졌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할아버지 때부터 가톨릭 신자인 마이일켈네는 마을에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위험을 느낀 크리스찬들이 대부분 개종했지만 마이일켈 집안은 끝까지 신앙을 고집했다. 밤에는 돌멩이가 날아들고 총소리까지 울렸다. 급기야 아버지는 집 앞 길섶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마이일켈은 장례를 치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그리고 우선 아들과 딸만 데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사이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마이일켈이 집에서 난민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다. 그는 2013년에 종교적 박해로 인해 피난을 왔다. ⓒ 민병래

 
뒤따라 들어온 아내는 한국에서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심했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야위어 갔고 고혈압과 관절염이 몸에 틀어박혔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 사태 이후 난민을 범죄자로 보는 분위기 탓에 밖에 나가지를 않았다. 그렇게 방구석에서 아내의 병은 깊어만 갔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서둘러 탄 인천행 비행기

사실 마이일켈은 집주인이 이날 아침 9시에 오기로 해서 아내를 돌보기보다 자기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계약만료 두 달을 앞두고 집주인은 "주변 시세가 많이 올랐다. 부동산 가서 물어보면 안다"며 월세 60만 원을 75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미아일켈은 단 돈 만 원도 어렵다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마이일켈이 한국에 와서 먼저 몸을 뉘인 곳은 안산의 친구집. 현금 몇 푼만 가지고 몸만 빠져나온 터라 염치불구하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그 집에 밀고 들어갔다. 고향에서 하던 사업을 친지들이 대신 처분해주면서 돈이 조금씩 송금되었다. 서둘러 아내와 손주들을 불러들였고 방 두 개짜리 다세대 주택을 얻었다.

아침이면 화장실 하나에 줄을 서고 코딱지 같은 부엌에서 돌아가며 밥을 먹었다. 다행히 주변 성당의 교우들과 난민지원 단체들에서 보증금을 도와줘 방 4개인 이곳으로 이사 온 게 2년 전이다. 천장은 내려앉고 도배는 일어나고 화장실 타일도 떨어진 집, 여러 사람 도움을 받아 살만한 집으로 고쳤고 이제 정이 들었건만, 식비조차 모자란 처지에 15만 원을 올리면 숨이 턱에 찰 것이다.

마이일켈이 아내의 무릎을 어루만지며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58분, 아내도 누운 채로 시계만 쳐다본다. 초인종 소리가 나기 무섭게 며느리가 겁먹은 표정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마이일켈은 어금니를 깨물고 일어섰다. 가슴이 벌렁벌렁해진다. 아내는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마이일켈은 거실에 있던 며느리와 손주들을 방으로 들여보내고 문밖으로 나섰다. 방으로 들어가는 며느리의 작은 어깨를 보니 마이일켈의 마음이 미어진다. 시어머니가 자리에 누워있으니 살림은 온전히 며느리의 몫이다.

한국에서 낳은 두 아이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데 꿈도 못 꾼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세 녀석들에게 용돈 몇천 원 쥐어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들 내외는 재심사에 재심사를 받았는데 난민 인정을 거부당하고 인도적 체류 비자도 못 받았다. 그래서 이젠 3개월마다 연장하면서 출국명령서를 안고 산다. 그러니 건강이 좋지 않은 자신을 대신해 이삿짐센터로, 공사장으로 불안한 일당만 뛸 뿐이다.

딸도 시간제 일을 하지만 코로나로 "내일부터 쉬세요"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그렇게 모이는 쬐그만 돈으로 월세에 가스비, 약값에 대가족 식비, 체류 연장 수수료까지 해결해야 하니 며느리 얼굴에선 그늘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가족이 받은 출국기한 유예 허가 통지서 3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그의 가족을 받아줄 나라가 없다. ⓒ 마이일켈 제공

 
마이일켈이 문을 열고 나가니 어둑한 복도에서 집주인은 먹구름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 '들어오시라' 해도 마다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내외도 월세 받아 삽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섰다. 집주인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검은 빗물이 들이쳤다. 복도 여기저기에 "15만 원, 15만 원"이라는 말이 메아리 치며 빗물을 뚫고 다녔다.

처음 월세 얘기가 나왔을 때 마이일켈이 '임대차보호법' 얘기를 슬쩍 꺼냈었다. 집주인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방 네 개에 월세 100만 원 받을 정도로 지금 시세가 올랐어요"라고 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마이일켈이 고향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니 "여기는 코로나 기간 동안 월세를 못 내도 쫒아내지 못하게 임시로 법이 만들어지고 있어, 한국은 우리보다 선진국이잖아, 그런 법 없어? 정부가 해결해 줘야지"라는 되물음을 들었다.

0.4%에 불과한 한국의 난민인정률

마이일켈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당연히 난민 판정을 받을 줄 알았다. 그는 피난처를 고민할 때 잠깐 필리핀을 떠올렸다. "영어를 쓰고 카톨릭 국가이고... 하지만 거리 곳곳에서 사설 경비원조차 총을 메고 있는..." 그러다가 2005년 처음 가 본 한국을 떠올렸다. 

안전하고 깨끗한 나라고, 성당과 교회가 나뉘어져 있어 신기했지만 신자들끼리 도와주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게 부러웠다. 그게 계기가 되어 한국전자제품을 가져다 고향에 팔았다. 필리핀 때문에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나서야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0.4%(2019년 기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트럼프 시절의 미국도 43%(2015년 기준)이건만. 난민 불인정 결정서에 "종교적 신념에 따른 차별이 없었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허탈했다. 대한민국은 아시아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2013년 7월 난민법을 시행했다고 자랑하지만 난민을 유엔인권협약에 따른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범죄자'처럼 본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고향의 친구들은 "한국도 일본의 식민지였잖아, 그때 세운 임시정부가 난민이었던 독립군이 상해에서 세운 정부고 지금 대한민국은 그것을 이어받았으니 잘 될 거야" 하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한국의 역사까지 들먹였다. "거 왜 김대중 대통령 그 사람도 정치적 난민으로 일본과 미국에 있었잖아" 하는 얘기까지 덧붙이며 희망을 주었건만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마이일켈은 한국의 난민정책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 말만 그럴듯한, 난민으로 인정은 못하지만 쫒아내지는 않는다는 '인도적 체류' 비자로는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한 가족임에도 아들 내외와 손주들은 인도적 체류비자조차 못 받았다. 한 가족이고 똑같은 사유인데 왜 안 되냐고 물으니, 출입국 관리소는 "그것은 우리 소관이고 우리가 결정한다"는 말만 했다. 
 

마이일켈의 딸과 며느리가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 한국에서 영주권을 얻는 게 그의 염원이다. ⓒ 민병래

 
그때부터 아들 내외와 손주들은 '취업불가'라고 찍힌 '출국기한유예허가서'를 받아 2개월이나 3개월 마다 연장을 해야 했다. 부부는 그때마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냈다. 이 기한을 넘기면 불법 체류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너무 힘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너무나 위험했다.

난민 인정률이 높은 캐나다나 독일로 갈 방법도 찾아봤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 신청자로 10년 가까이 보낸 마이일켈의 가족에게 그 나라에서 비자가 나오는 건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비행기를 탈 돈도 없다. 설령 표를 산다고 해도 항공사에서 탑승 허락을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래저래 벼랑 끝이다.

아들 내외는 출국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초등, 중등 교육을 받는 손주들, 아니 이곳에서 태어난 손주들만이라도 인도적 체류 비자가 나와 의료보험이라도 되면 좋으려만, 이마저도 막혀 있다. 그러니 4살 아이가 기침만 해도 온 가족이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정부 기관 이곳 저곳에 손을 내밀어 봤지만 "규정이 없다. 우리 소관이 아니다. 무너지는 자영업자 대책도 버겁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기도에서 10만 원을 받은 게 전부다. 취업불가여서 생활비도 벌 수 없고 그나마 성당과 교회, 난민지원단체의 도움이 있어 겨우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마이일켈이 손주와 노는 모습 가족들의 살길을 찾는 것이 그의 염원이다. ⓒ 민병래

    
마이일켈은 근심하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내에게 며느리에게 뭐라 얘기해야 할까 궁리하는데 답이 마땅치 않았다. 문을 여는데 아랫니가 아프다. 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아픔, 스트레스를 받으면 치통이 몰려와 떼굴떼굴 구른 적도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문을 여니 아내와 딸, 며느리가 거실에 불도 안 켠 채로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 마이일켈은 가슴이 뛰며 울렁증이 심해졌다. 전화가 오면 혹시 출입국관리소에서 인도적 체류 연장이 안 된다는 통본가 지레 겁먹었다. 초인종이라도 울리면 밀린 가스비를 독촉하는 방문인가 철렁했다.

아들 얼굴이 어두우면 혹시 일자리가 끊겼나? 며늘아기가 눈길을 돌리면 손주들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못 보내는 할아비 처지가 원망스럽다. 날개를 펴고 싶었다. 식구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싶었다. 난민 처지를 각오했던 용기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기에, 땀 흘리며 한국에 기여하며 살고 싶었건만...

마이일켈은 무언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거실의 어둠은 야차처럼 입을 벌리고 있고 창문에는 후두둑 빗방울이 들이쳤다. 마이일켈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입을 뗐다

"아 주인하고 얘기가 잘됐어!"
"어떻게요?"


아내, 며느리, 딸이 동시에 외친다. 놀랍고 의아한 표정으로 며느리와 아내는 턱밑까지 다가선다. 어느새 중학생 손주 녀석까지 나와서 할아버지를 큰 눈으로 바라본다.

"아, 주인이 우리 사정을..."

마이일켈이 우물대며 말을 꺼내는 데 그의 핸드폰이 우우웅 울렸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문자다.

"귀 세대의 관리비가 계속 연체되어 다른 세대에게 피해가 가고 있습니다. 빨리 납부하시기 바랍니다."

<못다한 이야기>

① 이 글을 쓰는데 유니버설 문화원의 전 원장 인도 출신 바수무쿨씨가 통역을 도와주셨습니다. 마이일켈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분은 본 기자에게 쪽지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② 이 글을 쓰는데 오마이뉴스의 기획 연재 <이제는 K-추방인가>와 <낯선 이웃>(이재호 지음, 이데아출판)을 참고했습니다. '아시아 평화를 향한 이주'의 김영아 대표가 한국의 난민정책에 대해 자문의견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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