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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은 누구나 기억하는 민주화의 역사이지만 1991년의 투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91년의 어느 봄날,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노태우 정권 타도, 학원자주화 투쟁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자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이 과정에서 폭력정권을 규탄하며 모두 11명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1991년 열사투쟁 30주년 기념사업회'는 30년 전 1991년 5월 투쟁에서 민주의 꽃이 된 열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편집자말]
김귀정 열사.
 김귀정 열사.
ⓒ 김동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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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김귀정은 아버지 김복배씨와 어머니 김종분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김귀임과 아래로는 동생 김종수가 있다.

김귀정에게 가족이 유복했던 기억은 없다. 월급쟁이보다는 개인사업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고,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노점 행상에 나선 어머니 김종분씨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가족의 버팀목이 되었다.

반짝반짝 빛나던 아이
 
어린 시절 언니, 남동생과 함께(오른쪽이 김귀정 열사).
 어린 시절 언니, 남동생과 함께(오른쪽이 김귀정 열사).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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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힘겹게 이어갔던 나날들. 그러나 김귀정에게서 가난의 그림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생업 때문에 바쁜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적었지만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해내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리고 특유의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친구들과도 잘 지내면서 자아를 채워 갔다.

어린 시절 김귀정이 살았던 곳은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던 곳이다. 학교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들이 살았던 동네. 친구들도 김귀정과 다를 바 없는 형편의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귀정과 함께 어울려 놀고 공부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모범생으로 성장해 대학에 진학하고 지금은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성실했고 적극적이었던 친구들과 보냈던 소중한 시간. 김귀정이 삶 속에서 보여 준 끈기와 강단은 그 시절부터 다져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미래의 꿈을 향해서만 달려가기에는 쉽지 않은 삶이 계속되면서 김귀정의 성격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소꿉친구가 아닌 다른 친구들은 집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던 김귀정은 어느새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욕심 많은 여고생으로 성장했다.

김귀정은 그 무렵부터 어머니에게 노점 일을 그만두라고 자주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삶이 나아질 다른 방편이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뜨면 높은 현실의 벽을 마주해야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맞서야 했다.

너였기에 더 좋았던 시간
 
무학여고 시절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사진 왼쪽이 김귀정 열사).
 무학여고 시절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사진 왼쪽이 김귀정 열사).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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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거리의 좌판에서 가족을 책임지고 있었고, 언니도 대학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자기 욕심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결국 김귀정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퇴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자동차 정비소에 사무직으로 취직해 낮에는 직장 생활을, 밤에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모님을 도왔다. 악착같이 일했고, 악착같이 공부했던 시절,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대학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김귀정은 3년 뒤인 1988년에 성균관대학교 불문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돈을 벌어야 했고, 전공 공부까지 해야 했기에 여유와 낭만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 김귀정이 선택한 것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통일연구동아리인 '심산연구회'에서 새로 시작한 대학생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아마도 김귀정이 동아리 활동, 심지어 운동권 동아리 활동을 잘할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기들보다 두세 살 많은 나이, 등록금을 벌기 위해 빠질 수 없었던 아르바이트는 아무래도 제약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귀정은 누구보다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이어 갔다.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총학생회에서 '영구 분단 전쟁교육 전방 입소 거부 투쟁'을 하며 대학본부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대학본부에서 밤을 보내는 선배와 동기들에게 김귀정은 매일 아침 직접 싼 도시락을 갖다주었다.

김귀정의 정성은 동아리 엠티(MT)에서도 빛을 발했다. 집에서 반찬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김귀정 덕에 동기와 선후배들은 매 끼니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르바이트 때문에 엠티에 참여하지 못할 때에도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서 청량리역으로 배웅하러 갈 정도로 주변을 잘 챙겼다. 김귀정은 전공 수업에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동아리 생활을 했다.

아무리 동기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세 살이나 많은 김귀정은 동기들에게 언니였고, 누나였다. 실제로 1학년 초에는 동기들이 '언니',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동기들은 김귀정을 찾았고, 김귀정은 가족처럼 그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던 중 2학기에 새로 들어온 나이 어린 동기 한 명이 '귀정아'라고 불렀을 때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동기들 사이에서 '귀정이'가 되었고 그만큼 더 가까워졌다.

김귀정에게 호칭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마음을 나누고 가치관을 나누는 동지임이 더 중요했다.

내가 걷는 길
 
1985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문과 입학식에서.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바로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1985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문과 입학식에서.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바로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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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성균관대 1학년 때 동아리 심산연구회 MT에서(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귀정 열사).
 1988년 성균관대 1학년 때 동아리 심산연구회 MT에서(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귀정 열사).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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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독재정권과 맞섰던 시절,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김귀정은 어느새 극렬 운동권이 되어버린 고등학교 친구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감상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내가 먹고살아야 한다'고.

김귀정이 다시 대학생이 되고 심산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운동적 삶을 고민하는 동안, 그 고등학교 친구는 수배자가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토론하며 한국 사회의 모순과 가려진 진실을 머릿속으로 인식하고 있는 동안 그 친구는 가슴으로 움직이며 발로 뛰는 진정한 청년 지식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통해서 들여다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채 주저앉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고 다짐한 김귀정은 그 후 사회의 진보를 위해 투쟁하는 청년 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대학생으로, 바쁜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사회의 모순과 개혁에 관심을 갖게 된 1학년 시기를 지나 2학년이 되면서, 삶에 대한 김귀정의 고민도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은 군대에 가고 여자 동기들도 학생회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귀정은 심산연구회 회장이 되어 동아리방을 지켰다. 더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를 맡으면서 김귀정은 동아리 활동을 넘어 실천하는 운동가로서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혹독한 삶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동기와 선후배, 그리고 조직을 챙기며 논리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신념'을 지닌 운동가로 살아가기 위해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 나갔다.

심산연구회 회장을 할 때 김귀정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늘 주변 사람들을 챙겨 왔던 김귀정이었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주변 사람들은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료들의 크고 작은 일에 기꺼이 발 벗고 나섰던 김귀정은, 자신의 아픔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지만 김귀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여전히 잘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소리 없이 주변을 챙겼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동아리연합회 활동까지 하면서 자신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김귀정은 여전히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었고, 무엇이든 하고 있었다.

불안과 다짐 사이
1990년 말 동아리연합회 선거 출마를 위해 찍은 사진. 이 사진은 몇 달 후 열사의 영정 사진이 되고 말았다.
 1990년 말 동아리연합회 선거 출마를 위해 찍은 사진. 이 사진은 몇 달 후 열사의 영정 사진이 되고 말았다.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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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조용한 눈동자, 반듯한 이목구비, 옅은 미소. 단아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선거 출마를 위해 찍은 사진이 불과 반년 뒤 자신의 영정 사진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학생회 간부가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했다. 수배와 구속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모든 부담을 감수하고 선거에 출마했으나 아쉽게 낙선한 뒤 김귀정은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기들보다 3년이나 늦게 들어온 학교에서 4학년을 앞두고 있던 김귀정에게도 현실적인 문제들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나는 뭘 하고, 뭘 먹고 살아야 할까.' 여전히 가난했던 형편 속에서 사회로 나가는 출구 앞에 선 김귀정은 미래를 향한 불안 속에서도 끝까지 변함없는 운동적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실제로 김귀정은 열악해진 심산연구회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며, 1991년 4월에는 '조국의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위한 성균관대학교 학생추진위원회'의 정책 담당을 맡아 활동했다.

잔인했던... 1991년의 봄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서 곤봉과 최루탄으로 토끼몰이식 폭력진압을 하고 있는 전투경찰.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서 곤봉과 최루탄으로 토끼몰이식 폭력진압을 하고 있는 전투경찰.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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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정 열사가 쓰러져 숨지던 당시의 사고현장 약도.
 김귀정 열사가 쓰러져 숨지던 당시의 사고현장 약도.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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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가 죽었다.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구속된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대학생이 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신입생이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사망한 것이다.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했지만 더 잔인했던 노태우 정권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노동자, 재야 인사 등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1991년 5월 25일. 그 전날 김귀정은 심산연구회 방에서 후배들과 밤새 토론했다고 한다. 당시 성균관대학교 학생추진위원회가 5월 대동제 기간에 대중적 행사로 기획한 '통일방안 심포지엄'에 제출할 통일정책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토론이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집으로 간 김귀정은 잠시 눈을 붙였다.

어머니 김종분씨는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밤새 뭘 하고 들어왔는지 오자마자 자빠져 자드라고. 오후 2시에 깨워 달라고 하면서 말이여. 너무 피곤하게 자길래 깨울까 말까 하다 깨웠더니 지지배가 부시시 일어나더니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더라고…. 그러곤 잘 안 입던 치마를 입고 나가더니만 금세 들어와서 청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갔어. 또 데모하러 나가는가 싶었제.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자빠져 자게 내버려 두는건데…."

김귀정이 치마를 입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던 그날은 전국적으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린 날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퇴계로에서 5시경 시작된 시위. 수만 명의 시위대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수천 명의 전투경찰이 뒤섞인 퇴계로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양쪽에서 압박하면서 진입했고, 꼼짝없이 포위된 시위대는 대한극장 맞은편의 좁은 골목길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골목의 입구를 막은 채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의 머리 위로 터뜨리며 방패와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시위대는 골목길에 주차된 자동차와 짐더미들 사이에서 도망가지도 못한 채 하나둘 쓰러져 갔다. 전경과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폭력 진압 속에 쓰러진 김귀정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잔인했던 1991년 봄의 마지막 희생자, 김귀정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1991년 6월 12일 김귀정 열사의 영결식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1991년 6월 12일 김귀정 열사의 영결식에서 성균관대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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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김귀정 열사의 묘역.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있는 김귀정 열사의 묘역.
ⓒ 2021귀정 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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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김귀정의 20대를 관통하는 삶의 질문은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남 앞에 잘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무심하지도 않았던 김귀정은 대학생활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사회의 방관자에서 현실의 참여자로 변화해 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의 고민과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으며 답을 찾고자 노력했던 김귀정.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흔들림 없이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운동가로서의 실천적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김귀정. 그렇게 김귀정은 내가 아닌 남을, 우리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렸던 김귀정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 자신을 향해 꾹꾹 눌러 썼던 그의 다짐은 어쩌면 살아 남은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모금계좌 : 농협 356-1492-0647-43 안영민(1991년 열사투쟁 기념사업회). 여러분들이 모아주신 마음은 1991년 열사들의 기록영상 제작과 30주년 종합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됩니다. 모금에 참여해주신 분들은 종합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크래딧에 명단을 공개합니다.

*이 글을 쓴 '귀정2021 준비위원회'는 김귀정 열사 30주년을 맞아 결성되었으며, 추모제와 추모 콘서트, 추모 다큐멘터리 상영 등 다양한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아주신 마음은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 김종분 여사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의 제작 및 개봉을 위해 사용됩니다(모금계좌 : 우리은행 1005-301-817470, 예금주: 사단법인 성균민주기념사업회).


태그:#김귀정, #1991년 5월 투쟁, #성균관대, #심산연구회, #노태우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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