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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은 원래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있는 '교육권'의 준말이지만 사회적으로 교사의 권리라고 정의내려진 이후에는 '교권이 지켜져야 한다'는 돌림노래만 들린다. 2021년 스승의날을 맞아 연대체 '연대하는 교사잡것들'에서는 연속기고 '#교권이_아니다'를 통해 교권에 대한 논의를 펼쳐보고자 한다.[편집자말]
서울 거리
 서울 거리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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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도 더 된 일이다. 같은 학교 학생이 이성 지인(사실 확인이 되지 않았으므로 애인이나 친구라는 표현은 그 학생에게 불리한 진술이므로 지인이라고 칭하고자 한다)과 모텔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어떤 학생이 학교에 소문을 냈다고 했다. 소문을 들은 담임교사는 당사자 학생의 양육자를 소환했고, 상의(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운 '설득') 끝에 학생은 '불건전한 이성 교제' 교칙 위반 문제로 결국 자퇴하게 됐다.

나는 이 사건을 교무실 옆자리에서 지켜보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학생의 소식은 그 뒤로 들은 적이 없다. 이후 국가인권위의 미혼모 학생 학습권 보장 결정이 이뤄지고 미혼모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교칙과 이성 교제를 금지하는 교칙을 개정하라는 교육부 지침이 이어졌다. 사건 당시엔 찜찜한 마음이었지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교육부 지침이 이슈화되면서 서서히 잘못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깨달아 가는 중이다.

네 가지 잘못 

지금까지 알게 된 내 잘못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이 이성 지인과 모텔에서 나온 것 자체는 법적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그때 나는 몰랐다. 청소년의 이성 지인과의 숙박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모텔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숙박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고, 그랬다고 해도 청소년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는데, 청소년에 대한 법적 보호는 필요하지만 법을 어기지 않은 청소년에 대한 강제적인 간섭은 입법 취지에도 맞지 않고 청소년에 대한 존중과 보호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 교제 금지 조항이 법적 근거가 없지만 '현실적 이유'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학생이 이성 지인과 모텔에서 나온 것이 이성 교제의 완벽한 증거일 수도 없다. 다른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 이성 교제의 가장 결정적 증거는 자신의 감정일 수밖에 없는데, 그 감정은 당사자가 자백하기 전까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도 매우 어렵다. 

이렇게 잘못이 없거나, 잘못이 확인된 적이 없는 학생을, 학교 측이 규칙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학습권을 침해하고 교육적으로 부당한 처우를 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이런 자의성을 인정해서 많은 학교들이 '윤리 거리(이성 간 30cm 거리 유지)' 조항을 만들기도 하고, '밀폐된 공간에 이성과 단둘이 머무르기 금지' 조항 등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규정의 자의성을 극복하기 위한 법치주의적 노력이 오히려 남녀칠세 부동석의 조선 시대로의 회귀를 낳았다는 아이러니는 주목할만하다.

둘째, 학생이 자백을 하고 인정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는데, 양육자가 대신 인정하고, 창피해했고, 담임교사는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며 소문나지 않도록 빨리 자퇴할 것을 종용했으며, 나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학생은 한 사람의 시민이자 주체로서 자신을 변론하고 방어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차라리 퇴학이나 기타 다른 징계였다면 방어의 기회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퇴는 징계도 아니다. 법적인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학교도 알고 부모도 아는데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을 했으니 서로 불편하지 않게 학교를 떠나라는 부당한 요구와 타협처럼 보였다. 정당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누구 하나 학생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당사자에게 묻지도 않았고 어떤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맞잡은 손
 맞잡은 손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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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학생이 이성 교제(신체 접촉이나 성 실천 행위 포함)를 하더라도 이는 법 위반도 아닐뿐더러 사생활의 영역이므로 오히려 보호받아야 하고 더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안내받아야 하는데 나는 그런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 유엔아동권리협약도 몰랐고, 학생인권조례도 당시엔 없었다. 학생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는지 공부한 적도 없었다. 학생들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낙태죄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말도 몰랐다.

단지 학생이 임신을 하면 겪게 될 어려움과 사회적 편견을 알았고,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성 실천의 시기를 미루든가 성 실천을 하더라도 피임을 통해 임신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미혼모의 학습권을 보장하라고 하자 피임 중심의 성교육으로 대처한 것은 나의 이런 생각과도 일치하는 잘못된 방향이었다. 교사로서 직무에 성실하지 못했던 탓이고 학교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넷째, 소문낸 학생의 행동상의 문제점에 대해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어떤 교육적 조치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의 사생활을 학교에 소문내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을 알고도 그랬다면 정말 명백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비밀을 보장하는 것이 더 권장할 일이다. 정말로 그 학생이 걱정됐다면 상담교사나 다른 교사에게 조용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동성 교제하는 학생들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이 행위의 문제가 명백하다. 지금은 그런 일을 아웃팅이라고 부르고 폭력적 행위로 생각하고 있다. 타인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윤리에 대해 나는 고민하거나 교육한 적이 없었다.

이성 교제를 금지하는 교칙이 있으면 타인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이 교칙으로 인해 타인의 대인관계에 대해 교칙 위반인지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이성 교제 금지 교칙 위반인데 교사의 눈에 띄지 않아 처벌 받지 않는 경우에 대해 학생들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면 신고로 이어지고 교사들은 처벌 과정에서 더 난처해지게 된다.

사회에서의 풍기문란이나 공연음란죄 처벌에 있어서도 공공장소의 요건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유동인구가 많았는지, 낮이었는지, 사람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소였는지 등의 조건들을 따진다. 경찰이 이렇게 하는 건 자칫 사생활 침해의 여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하물며 더 많은 사생활 보호가 이뤄져야 하는 교육의 공간에서 경찰보다 더한 사생활 침해의 길을 여는 것은 학교 민주화 측면에서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타협하는 나 

지금까지 나열한 잘못들이 그 사건에서 내가 저지른 잘못의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인권을 공부하면서 나는 더 많은 나의 잘못을 알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담아 교육해야 그 잘못을 조금이나마 책임질 수 있다. 내 잘못으로 인해 교육권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불안하고 불편한 교육을 받은 많은 학생들에게 반성과 사과를 계속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면 스승의 날 즈음에 반복되는 학생 인권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는 주장이 불편하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교사들이 나처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들이 생각을 바꾸면 좋겠다.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교사들의 충격적인 잘못만 보면 내가 앞에서 고백한 것과 같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잘못들에 눈감게 된다. 내가 알기로는 교권에 관한 많은 판례들은 학생의 교육권 내지 학습권이 교사의 교육상 권한(이를 교권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보다 우선적이고 기본권적 권리라고 인정했다.

학생의 교육권은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행복 추구권 등의 기본권과 같은 수준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교권은 그런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교육으로 도울 수 있는 수단적 권한일 뿐이다. 그 권한은 반드시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 교제의 기본권을 금지하고 간섭하는 것은 교권이 아니다. 학생의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여,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생의 사생활을 통제하는 것은 교권이 아니다.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교사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그대로 학교에서 실천하지는 못한다. '현실적 어려움'과 타협하고 있다. 최근 밀의 <자유론> 중 "다수의 횡포"를 다룬 부분으로 수업하면서 타협하는 나를 돌아봤다. 정치적 권력보다 사회의 권력이 더 강한데, 사회는 구성원의 세세한 행동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치적 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듯, 사회의 권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내가 학생 인권 보장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강력한 사회의 (편견의) 힘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강력한 사회의 힘은 없는데, 있다고 상상하며 혼자 무서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전에 공부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더블씽크(두 가지 모순되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가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을 떠올렸다. 내가 학생 인권에 대한 더블씽크로 학생 인권 보장을 지연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했다.

이성 교제 금지 교칙에 반대하여 학생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적으로 미혼모나 낙태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지닌 다수의 또는 다수라고 생각되는 강한 힘에 맞서는 것은 힘든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믿으며 손 놓고 있는 내가 다수의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원인임은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또한 동성 교제 금지도 교권이 아니다. 동성 교제를 죄악으로 보는 것은 특정 종교의 입장이며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를 믿는 시민들과 교육 활동을 하는 교사가 동성 교제를 죄악시하거나 동성 교제를 금지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시민의 행복 추구권 등 기본권의 침해에 해당할 것이다. 교사가 자신의 개인적 신념으로 동성 교제에 대해 차별행위를 하는 것이 반교육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포괄적 차별 금지법 제정은 학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육적 사안이다.


태그:#이성교제, #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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