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7 07:33최종 업데이트 21.05.2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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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퇴사 후,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만들고 싶은 여성들의 커뮤니티 '창고살롱'을 공동 창업했다. 창고살롱에서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 화상회의 툴인 줌(ZOOM)으로 모여 책과 영화에 대해 구조화된 대화를 나누고, 내 삶에 참조점이 될 수 있는 연사들의 발표와 강연을 듣고, 각종 소모임을 함께 한다. 

세상에 없던 서비스를 만들고(엄마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다) 무려 유료 멤버십 회원을 모집한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0부터 100까지 하나하나 고민하고 부딪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다. 매일 삽질하고 머리 쥐어뜯으면서도 비슷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창업 멤버들과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다. 일과 삶의 변곡점에서 커리어 방황기를 보내고 있는 30~40대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하루하루가 설렜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있는 일이 투명하게 일치하는 경험. 이제야 '내 일'을 찾은 것 같았다.


3개월간의 시즌1을 끝내고 시즌2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아니 시즌2 모집을 준비할 때부터 징후가 나타났다. 익숙한 느낌. 번아웃이었다. 

일이 너무 재밌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이번 번아웃은 뭔가 달랐다. ⓒ unsplash

 
맡은 일은 세세한 것 하나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 탓에 일을 할 때 몰입도가 높은 편이다. 목·어깨가 늘 긴장돼 있어 회사 다닐 때는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목 디스크 증상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조금 더 심하면 소화불량과 어지럼증으로 이어졌다. 

회사 다닐 때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번아웃이 왔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일이 너무 재밌는데 일 생각만 하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종종 호흡이 힘들고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사는 공황장애는 아니라고 당장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관련 기사 : 일 중독, 자기혐오... '아이유'로 치유받는 밤)

약 봉투도 없이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허탈했다. 억울했던 것 같기도 하다.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 하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회사 다닐 때도 가본 적 없는 정신과라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커뮤니티 서비스를 만들었지만, 창업 이후 오히려 일과 삶의 경계는 무너졌다. 100% 재택근무를 하면서 눈 뜨면 출근 눈 감으면 퇴근이었다. 끼니도 놓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쉴새없이 일하고 회의하다 보면 100보도 걷지 않는 날이 많았다. 정신 차리면 어린이집에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육아 출근을 해서도 머릿속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갔다. 초보 창업가의 일상은 결정과 논의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에게 대신 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손에는 늘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체력은 점점 떨어졌다. 100% 충전해도 금세 방전돼 버리는 낡은 배터리처럼 번아웃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엄마는 일이 그렇게 좋아?"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글로 고백한 후, 많은 지인들의 연락과 응원을 받았다.

땀 흘리는 운동을 하며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 낫더라는 친구, 산책과 심호흡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후배, 산에 오르면 머릿속이 맑아진다며 등산을 함께 가자는 지인도 있었다. 전 직장 동료는 향초 켜놓고 잠깐이라도 숨 고르며 일하라며 향초를 선물로 보냈다.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데 정말 좋다며 혼자만의 힐링타임을 꼭 가지라고 신신당부한 친구도 있었다. 자꾸만 내 안에서 원인을 찾는 내게 또 다른 지인은 말했다. 

"그냥 현진님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통해 하고 싶은 게 뭘까. 돈을 많이 벌거나 이름을 알려야겠다는 야망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게 일은 꼭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였다. 엄마가 된 후로는 타의에 의해 일을 멈춰야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일이 더욱 간절했다. 오죽하면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라는 인터뷰집까지 만들었을까(서점에서 절찬리 판매중^^).

'일하는 나'라는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쉬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일을 벌였다. 일에서 효능감을 확인했다. "일하느라 바빠", "일에서 이런 성과를 냈어"라는 말로 내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려 했다. 일을 열심히 하는 나, 바쁘고 정신 없는 나에게 취해 있었다. 창업 후에는 더 심했다. 언젠가 6살 아이는 말했다.

"엄마는 일이 그렇게 좋아? 그럼 일만 해!" 

일이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내게 일은 성과주의와 인정욕구,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과 연결됐다. 숫자 하나,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했고 생각만큼 일에서 성과가 나지 않으면 내가 쓸모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커질수록 주변 사람과 나 자신을 돌볼 에너지는 줄어들었다. 내가 규정한 '일'을 뺀 나는 배터리 닳은 장난감처럼 시큰둥하고 게을렀다. 남편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아이와 진심으로 즐겁게 논 게 언제인지 가물했다. 선물 하나 포장해서 보내는 데 3주가 걸리고, 책상 의자 뒤에는 건조기가 토해낸 빨래가 산처럼 쌓였다. 일이 삶을 집어 삼킨 상태. 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상태. 이건 아니었다.

일을 끊어내는 연습 
 

동료들과 함께 남산 워크숍 갔을 때. 초록초록 하늘하늘한 걸 많이 보려고 한다. ⓒ 홍현진

 
나는 일을 잘하고 싶지만 일이 내 모든 것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일을 하며 효능감을 느끼고 유능하게 성장하고 싶지만 일에 대한 평가가 곧 나에 대한 평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이 곧 나인 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종종 불행하고 무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이 의미 있기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일하지 않는 시간, 소소한 취미를 즐기고 실없는 농담을 하고 남편과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 시간도 내게는 소중하다. 나는 일과 삶을 잘 굴려나가는 사람, 오래오래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즘 나는 일을 의식적으로 끊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평일에 캠핑을 떠나기도 하고, 마음 맞는 지인들과 맛집 탐방단을 만들어 한낮에 수다를 떨기도 한다. 주말에는 슬랙 앱을 지우고 일과 나를 분리하려 노력한다. 

얼마 전에는 창고살롱을 함께 운영하는 살롱지기들과 평일 하루를 떼어내 남산 워크숍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 생각은 잠시 접고 땀흘리며 둘레길을 걷고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근사한 점심을 먹었다. 돌아가면 밀린 설거지처럼 일이 쌓여 있겠지만 일단은 지금에 충실하면서.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발견하는 삶은 둘 사이 미지의 땅 어딘가에 있다.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길 잃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돌아옴으로써가 아니라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라고. 어쩌면 지금 나는 또다시 길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길을 잃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나 아득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길을 잃을 것인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방향을 조금씩 수정하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그리고 나처럼 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지질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뿐이다. 당신만 길을 잃은 게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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