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08 15:00최종 업데이트 21.06.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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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에 관한 퇴행적 판결들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4월 21일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5부가 고 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20명이 제기한 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소송요건 미비'를 이유로 각하했다.

이달 7일에는 같은 법원의 민사합의31부(김양호 부장판사)가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닛산화학 등 16개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각하했다. 사건번호가 '2015가합13718'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송은 6년 전인 2015년에 접수됐다. 장장 6년을 끌어온 재판이 본안 심리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각하 판결'로 종결된 것이다.


'원고 85명'은 그간의 강제동원 소송에서 최대 규모다. 이런 대규모 소송이 본안 심리도 받지 못하고 '물리칠 각(却), 밑으로 하(下)'의 판결을 받았다. 1945년 해방 이래 76년의 한(恨)이 서린 소송이 제소 6년 만에 일본 법원도 아닌 한국 법원에 의해 '물리쳐짐'을 받은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각하 판결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패소 판결과 진배없다.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 등의 입장에서는 승소나 다름없는 판결이다. 왜냐하면, '소송 요건을 갖춰서 다시 제소하라'는 의미의 각하 판결이라기보다는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이런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는 의미의 각하 판결에 가깝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30일의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이 나오기 전에 있었던 파기환송 판결이자, 신일본제철(지금의 일본제철)을 피고로 해서 나온 선고인 2012년 5월 24일의 대법원 판결과 비교해보면, 이번 판결이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큰 좌절감을 안기는 것인지 알 수 있다.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에서 각하 판결을 받은 유족 임철호(왼쪽) 씨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공판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소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날 열린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에서 원고 패소 판결과 같은 결과로도 볼 수 있다. ⓒ 연합뉴스

 
대법원 판결 뒤집은 재판부

2012년 재판에서 대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서도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대법원이 언급한 제2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는 해방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갖고 있었던 재산과,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갖고 있었던 재산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정리하는 조약이었다. 전범기업들이 노예노동을 시킨 뒤 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불법행위에 관한 조약이 아니었다.

만약 불법적인 강제징용을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청구권협정에서 합의됐다면, 그 같은 불법행위가 있었음을 일본 측이 받아들였어야 한다. 강제징용을 가능케 한 식민지배가 불법이었음을 시인했어야 하는 것이다.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시인하지 않았는데도 피해자·가해자 사이에 불법행위로 인한 법적 책임을 없애기로 하는 합의가 성립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법원은 한·일 양국 사이에 불법행위에 관한 양해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구권협정에 의해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칙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후략)
 
청구권협정이 한·일 국민 간의 청구권을 소멸시키기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노동자 징용이나 위안부 강제동원 같은 범죄행위로 인한 청구권까지 소멸시키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를 근거로 대법원이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판례가 있는데도, 이번에 서울중앙지법은 이렇게 판시했다.
 
청구권협정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청구권협정을 국민 개인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양 체약국이 서로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하는 내용의 조약이라고 해석하기 어렵고... (후략)
 
2012년 대법원 판결은 범죄행위로 인한 청구권과 여타의 청구권을 구분한 뒤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된 것은 후자뿐이라는 점을 드러낸 데 반해,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그 같은 구분 없이 '청구권협정으로 한국 국민들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논리를 폈다.

만약 일본이 '식민지배 시절의 강제징용이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면, 서울중앙지법의 논리가 맞다고 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일본은 범죄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불법성을 추호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일본이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강제징용 문제까지도 합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중앙지법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제한되므로 소송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각하했다. 이런 이유로 각하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앞으로는 이런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인지대금 미납 등을 이유로 각하 판결을 내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인 패소 판결이라고 볼 수 있다.

비엔나협약 제27조에 해당되는 거 맞나

서울중앙지법은 청구권협정 체결 외에 '비엔나협약 제27조'라는 또 다른 근거도 제시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청구권협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서울중앙지법의 논리다.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따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해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일괄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해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
 
오스트리아 비인(비엔나)에서 체결된 국제협약은 한둘이 아니다. 재판부가 말한 비엔나 협약은 1965년 청구권협정이 체결되고 4년의 시간이 경과한 뒤인 1969년 5월 23일 체결되고 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980년 1월 27일부터 발효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을 가리킨다.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을 듣다 보면, 식민지배가 불법하다는 이유만으로 옛 식민본국과의 조약을 무시하고 식민지배에 관해 새롭게 청구하는 일을 금지하는 규정이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런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가 국제법에 위반한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엔나협약 제27조를 실제로 살펴보면 그런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비엔나협약 제27조는 아래와 같다.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 된다.
 
재판부는 식민지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에 딴소리 하는 일을 막는 규정이 제27조에 있는 듯한 느낌을 풍겼지만, 제27조가 말하는 것은 '조약이 체결된 뒤 국내법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조약의 이행을 거부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내용이다. 조약 체결 뒤에 딴소리 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금반언(禁反言) 원칙을 규정했을 뿐이다.

국제관계에서 제27조의 금반언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규정이 이번 강제징용 재판과 관계가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조약이 체결됐다면 모르겠지만, 그에 관한 한·일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징용 피해자들의 문제 제기를 비엔나협약 상의 금반언 원칙 위반으로 볼 수 있는지를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에서는 다소 도를 벗어난 부분도 발견된다. 동맹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런 소송을 받아줄 수 없다는 뉘앙스로 판시한 대목이 그것이다.

일본과의 관계, 한미동맹 운운하는 판결문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 판결이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 피고들의 손해가 현실화하면, 다양한 경로로 일본의 중재절차 또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회부 공세와 압박이 이어질 것임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재판부는 본안심리를 거부하는 각하 판결을 내렸다. 그런 재판부가 본안심리를 받아들일 경우에 발생할지 모르는 사후 결과를 조목조목 예단한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패소를 당하고 강제집행를 당해 손해를 입게 되면 일본의 압박이 심해질 거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런 뒤 "여전히 분단국 현실과 세계 4강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 국가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된다"고 한 다음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헌법상 안전보장을 훼손하고 사법신뢰 추락으로 헌법상의 질서 유지를 침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원고의 청구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고 요건 불비를 이유로 각하한 재판부가 '원고의 청구가 받아들여지면, 한일관계가 위태해지고 한미동맹마저 훼손된다'고까지 주장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섰다는 느낌을 줄 만한 판결이다.

아버지가 강제동원 피해자인 85세 임철호씨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 직후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다"며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으면 이런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임씨의 표현처럼 이번 판결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나라 걱정을 많이 했지만, 대체 어느 나라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것인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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