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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시절 '물상'이라는 과목이 있었다(이 문장을 읽고 공감하는 세대는 70~80년대에 중학교를 다녔던 세대일 것이다). 나중에 '물리'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물상과 물리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내 눈에 '물상'이라는 단어는 간혹 '물성'으로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물성이나 물상이나 여하튼 물질적인 것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는 최근에 지식욕을 부채질할 만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문명과 물질>은 우리 인류 역사와 함께 했던 모든 물질에 관한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됐던 원시시대 석기부터 시작하여 점토, 구리, 청동, 철, 금, 은, 유리, 시멘트, 콘크리트, 알루미늄, 납, 백금, 플라스틱, 고무, 다이아몬드, 실리콘까지 그 생성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실로 인류의 문명은 물질과 함께 발달해왔으며 문명은 새로운 물질의 생성과 발달을 촉진했다. 문명과 물질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평소 물질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우리가 온통 '물질'들로 싸여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은 강철이나 콘크리트, 알루미늄, 플라스틱, 유리 등이 너무 흔한 재료여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지만, 모든 물질은 거저 탄생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탄생하는 순간, 그들은 얼마나 희귀하고 희소한 존재였던가. 
<문명과 물질>
 <문명과 물질>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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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상식도 많다. 어쩌면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을지 모르지만 다시 읽어보니 새로웠다. 이를테면 이런 사실들.

구리가 일찍부터 이용된 이유는 (아마도) 광석에서 추출해서 제련하기 쉬웠기 때문이며, 청동 덕분에 금속 갑옷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져 더불어 전쟁 문화도 발달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점토로 토기를 만들게 되면서 인류는 재료의 물리적 성질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으며,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철은 한때 금보다 더 값진 금속이었다는 것이다.

한때 철은 금보다 값진 금속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물질들 중에서 가장 내 관심을 끈 것은 '철'이었다. 한때 금보다 더 값진 금속이었던 철이 누구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바뀐 사건을 두고 저자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 혁명'이라고 말한다.

철이 상용화됨으로써 첫째, 장인들은 꼭 맞는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 도구의 발달로 식량 공급량이 증가하며 인구도 자연 증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리를 제련할 때보다 훨씬 숯이 적게 들어가는 철 덕분에 숯 소비량이 60%가량 절감되었다.

철기 시대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2000년대 말, 금속공들이 철광석 제련법을 터득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러한 제련법이 하루 아침에 발견된 것은 아니다. 철이 어떻게 어디에서 어떠한 경로로 제련되기 시작했는지 그 과정은 확실치 않다. 다만 유추할 뿐이다.

물질들은 시대와 장소를 따라서 흥망성쇠의 역사를 달리 했지만, 유독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금'과 '은'이다. 금과 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그 희생을 딛고 금과 은의 역사는 일보 후퇴도 없이 찬란하게 오늘에 빛나고 있다.
 
'금과 은은 오래도록 가치가 유지되고 공급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에, 곧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거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금본위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 100p
 
행간에 감춰진 제련공들의 희생과 노력까지 읽어야

이 책은 물질에 관한 이론서이기도 하지만, 물질과 함게 해온 인류 문명사이기도 하다. 물질의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고고학, 역사, 화학, 물리학, 문학, 신화 등의 이야기가 종횡무진 펼쳐져있어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온전히 다 이해하는 작업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이해가 있다면 수월하겠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결코 녹록지 않다. 물론 과학적인 지식이 없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다라는 아쉬움이 든다.

최근 발명한 물질들은 과학적인 지식이나 실험, 추론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지만, 철이나 구리, 유리, 강철, 청동 등 과학적 지식이나 통계, 자료, 실험도구 등이 없었던 아득한 옛날에는 시행착오에 시행착오를 거치며 제련법을 하나씩 구축해갔다. 인류가 조금씩 조금씩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룩한 문명이다. 때로 어떤 물질들은, 예를 들어 유리와 같은 것은 정말 우연하게 탄생하기도 했다.

물질이 인류의 문명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인류는 가혹하게 물질을 탐했다. '물질을 정복하는 자가 기술을 정복한다'는 일본전기주식회사 세키모토 다다히로의 말도 있듯 말이다.

물질 문명의 바탕에는 수많은 제련공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의 현대 문명과 기술은 숱한 제련공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것. 그 행간의 진실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이 책은 단순히 딱딱하고 객관적인 과학 에세이가 아닌 인류 문명사로 읽힐 수 있다.

문명과 물질 - 물질이 만든 문명, 문명이 발견한 물질

스티븐 L. 사스 (지은이), 배상규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21)


태그:#문명과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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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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