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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중재 상담을 신청하는 건수는 크게 증가했지만, 의료기관의 거부나 비협조로 사실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40%에 달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중재 상담을 신청하는 건수는 크게 증가했지만, 의료기관의 거부나 비협조로 사실상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40%에 달한다.
ⓒ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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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서 펴낸 의료분쟁 조정중재 통계연보(2019년)에 따르면, 연도별 의료분쟁 상담 신청 건수는 2014년 3만 9천여 건에서 2019년 6만 3천여 건을 훌쩍 넘었다. 이는 의료사고의 건수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과거에 비해 의료사고 구제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정비된 상황을 반영한 수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 국회에서 공개된 자료(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실 제공)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분쟁조정 참여율은 55.9% 수준이다. 이는 의료사고 피해자가 신청한 분쟁 건수 중 40% 이상이 의료기관의 거부 또는 비협조로 조정·중재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마지막 보루'처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상 피해구제 수단으로 여긴다기보다는 여론을 환기시키고, 분쟁 조정이나 소송이 어려운 상황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민청원을 제기하는 것이다.

의료사고 고발 청원인에서 형사사건 피의자로
 
2020년 9월 15일 젤리 엄마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무리한 유도분만 의료사고 고발 청원' 관련 강도태 보건복지부 제2차관의 답변 영상 갈무리
 2020년 9월 15일 젤리 엄마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무리한 유도분만 의료사고 고발 청원" 관련 강도태 보건복지부 제2차관의 답변 영상 갈무리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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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유도분만으로 열 달 내 건강했던 저희 아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료진은 차트를 조작하며 본인들 과실을 숨기려 하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2020년 9월 15일 젤리(태명) 엄마가 청와대 국민청원을 제기했다. 해당 청원은 청원 마감일인 10월 15일까지 20만 8551명의 동의를 얻어 11월 13일 보건복지부 강도태 제2차관으로부터 공식적인 답변까지 받았다.
     
젤리 엄마는 청와대 국민청원 제기 후 인터넷 맘카페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청원 참여 권유 글을 올리면서 의료사고 사망 의혹이 제기된 병원(이하 해당 병원)의 상호나 의료진의 실명은 게재하지 않았다. 해당 병원을 특정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상호는 "부산M여성병원"으로 표기했다. 해당 병원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변호사 자문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해당 병원 측은 "부산M여성병원"이라는 표기가 해당 병원을 특정했다고 판단해 작년 10월 22일 젤리 부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죄와 업무방해죄로 형사고소했다. 해당 병원이 부산지방경찰청 사하경찰서(11월 18일에 강서경찰서로 사건 이관)에 형사고소장을 접수한 후, 12월 9일에 젤리 부모는 강서경찰서 사이버수사팀에서 피의자 신문을 받았고 두 차례 소명자료를 제출하기도 했다.

강서경찰서는 최종 결정을 내리려면 해당 병원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형사사건 관련해 부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의료수사팀의 수사 결과를 참조해야 한다며 결정을 미뤘다. 그러다 작년 6월 22일 부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의료수사1팀이 수사를 개시한 후 약 6개월 만인 12월 23일 해당 병원의 담당 의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처럼 젤리 엄마의 주장이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었음에도 강서경찰서는 8개월째인 현재까지 수사를 종결하지 않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제도가 '국민과의 소통' 창구로 기능하려면

의료사고 피해자인 젤리 부모가 병원으로부터 형사고소까지 당해 졸지에 피의자 신분이 된 사건의 도의적 책임은 해당 병원에 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의료사고 피해자나 유족에 대한 보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 국민청원제도는 홈페이지에 청원 글을 게시하더라도 곧바로 공개하지 않고 30일 이내에 해당 청원을 지지하는 100명의 사전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고, 100명의 사전 동의를 받은 청원이라도 관리자의 검토를 거쳐 청원게시판에 공개한다.

관리자의 검토를 통해 개인정보, 허위사실,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포함된 청원은 삭제되거나 일부 내용이 '숨김' 처리된 상태로 공개된다. 젤리 엄마가 제기한 청와대 국민청원의 경우 청와대의 관리자 사전 검토에서도 "부산M여성병원" 표기에 대해 별도의 삭제나 '숨김' 처리 없이 그대로 공개되었다.

비윤리적이고 악의적인 의도를 모두 막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보호 장치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청원인들이 안심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젤리 엄마의 사례처럼 청와대 국민청원제도가 의료사고 피해자를 오히려 피의자로 만드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비단 의료사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젤리 부모의 경우와 같은 사례가 더 있는지 실태조사를 하고 억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청와대 국민청원제도가 애초 취지대로 '국민과의 소통' 창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의료사고, #청와대 국민청원, #젤리 의료사고,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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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동자.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으나 암 진단을 받은 후 2022년 <아프지만, 살아야겠어>, 2023년 <나의 낯선 친구들>(공저)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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