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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건영 멀티퍼커셔니스트.
 정건영 멀티퍼커셔니스트.
ⓒ <무한정보> 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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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최연소 오스트리아 빈국립음대 초청교수, 오스트리아 프라이너예술대학교 정교수,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객원단원, 비틀즈 드러머 링고 스타 소속 타악기전문브랜드 '루딕무써' 팀파니 아티스트...

예산고등학교 관악부에서 처음 악기를 잡아본 뒤 27살 늦깎이 유학길에 올랐던 정건영(47) 멀티퍼커셔니스트 앞에 붙는 수식어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연습에 매진하며 음악세계를 넓혀온 시간을 통해 이룬 성과들이지만, 그는 오로지 타악기 연주자, 무대에 서는 '광대'로 불리고 싶다고 한다.

20여 년 동안 오스트리아와 한국을 오가며 서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유명 연주홀에 초청돼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던 그가 2년 전 고향 충남 예산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계신 어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가면에 있는 집과 멀지 않은 당진 세한대학교에서 실용음악과 학과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는 건영씨를 20일 학교에서 만났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년처럼 맑은 눈빛을 간직한 그는 "고향에 오니까 참 좋아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음악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사소하고도 재밌다. 예산고에 입학하던 날, 관악부 선배들이 연주하는 '은색 악기'에 마음을 빼앗겨 음악실을 기웃거렸다. 마침 신입부원을 구하고 있던 그곳에서 트롬본(은색 악기의 정체)을 처음 만져봤지만 '팔이 짧다'며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상심한 채 음악실을 나오는데 바닥에 앉아 고무판을 북 삼아 두드리던 선배가 제게 쳐보라고 하더니 '재능있다'며 칭찬하지 않겠어요? 알고 보니 같은 시기에 입부한 친구도 '천재' 소리 듣고 들어왔대요. 타악기는 인기가 없다 보니 일부러 추켜세웠던 거죠."

북채를 건넨 선배는 훗날 건영씨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3년 내내 큰북과 작은북, 심벌즈를 연주했지만 음대 입시 준비를 하려고 보니 많은 돈이 필요했다.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던 그는 해군 군악대에 입대해 전공자들에게 악기를 배웠고, 한 선임이 자신을 가르치던 서울의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다는 말에 제대 뒤 상경했다.

당장 방 구할 보증금이 필요해 경기도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마련해 음악공부를 했고, 안 먹고 안 입으며 960만 원을 모았을 즈음 오스트리아 린츠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린츠에서 음대 입학을 도와주기로 했던 지인이 모은 돈 대부분을 들고 잠적해버린 것. 건영씨는 1년 동안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홀로 남아 다쳐도 병원 한 번 제대로 갈 수 없었던, 서럽고 서러운 시절이었다.

다행히 신도 수가 얼마 되지 않는 한인교회에서 만난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비엔나로 가 세계 정상의 클래식 음악가들을 배출한 빈국립음대에 시험을 치러 18명 가운데 유일한 합격자로 이름을 올렸다.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지도교수님이 스틱(채)을 감춰둘 정도였어요. 그런데도 무대에 서면 1시간 연습한 동기들이 10시간 한 저보다 좋은 연주를 보여주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더니 그 친구들은 무대를 즐기고 있더라고요. 교수님이 '밖에 나가 커피라도 한 잔하며 여유를 가져라'고 하셨던 게 이해가 됐죠."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곡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시대 상황과 모차르트와 같은 거장들의 생애를 탐구하고, 각종 철학책을 섭렵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결과 석사를 거쳐 최고연주자과정까지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에서 온갖 역경을 헤쳐온 청춘의 나날은 그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했다. 음악이 진정 가야할 곳을 생각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고민했다.

'교육'의 길을 택한 건영씨는 매주 당진 특수학교(꿈나래학교)와 청소년문화의집 등을 찾아 발달장애인 아동, 조손가정 아이들을 가르친다. 열정적인 지도 덕에 합덕고등학교 특수학급 '해늘합주단'은 전국장애학생 음악콩쿠르 대회에서 금상도 받았다. 

아이들이 정말 즐거울 때 짓는 표정을 보면 행복하다는 건영씨, 깔깔 웃는 소리 자체만으로도 음악이 된단다. 느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고 음악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만이다. 
 
정건영 멀티퍼커셔니스트.
 정건영 멀티퍼커셔니스트.
ⓒ <무한정보> 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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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다. 수 년 전 아들이 나오는 예술의전당 기획공연에 초대했던 어머니가 자리가 불편해 공연 도중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듣고 악기를 챙겨 시골집으로 가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지금도 어머니가 연주를 가장 즐겨 듣는 곳은 마당 한쪽에 놓인 소파다. 음악을 듣다 풀도 뽑고, 밭에 틀어놓은 수도꼭지도 잠그러 간다. 아이들을 만날 땐 '앵그리버드' 주제곡이나 '아기상어' 노래를 들려주고, 악기도 마음껏 만져볼 수 있게 한다.

음악을 통해 평화와 희망, 사랑을 건네고 싶다는 건영씨는 '의식있는 예술가'를 강조한다.

"음악은 춥고 배고픈 곳에 가야 해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고요. '보헤미안 랩소디'로 유명한 퀸은 당시 영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예술가에게 사람들은 열광한 겁니다. 음악에 사상과 철학이 없다면 공연장을 찾을 이유는 없어요.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고 대화를 걸어야 합니다."

예산을 향한 애정도 남다르다. 오스트리아 지인들이 서울은 몰라도 예산은 안단다. 이들을 초대해 예당저수지에서 어죽을 대접하고, 옛날 나무 대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고향집에서 재웠다.

이곳에 머물며 옛 친구와 함께 신암 추사고택 근처 용산을 산책하다가 어렸을 때처럼 아카시 꽃을 따먹은 이야기, 덕산온천수를 떠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자전거를 끌고 다녀왔던 이야기... 한보따리 추억을 풀어놓는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예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건영씨. 음악을 즐기며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단다. 교육행정이 적극 협력한다면 가능할 터, 그와 함께 우리지역 꿈나무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연주가 가득 울려퍼지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태그:#정건영, #멀티퍼커셔니스트, #타악기 연주자,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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