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0 15:43최종 업데이트 21.08.20 15:43
  • 본문듣기
한국 경제의 전설적 인물로 기억되는 관료가 있다. 박정희 정권 후반부터 전두환 정권 전반까지 한국 경제를 이끈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바로 그다.

김재익은 해박한 이론과 출중한 열정 그리고 학자적 풍모 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만 45세 때인 1983년에 미얀마 아웅 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도 그를 한층 극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2018년 12월 10일 퇴임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3개월 뒤인 이듬해 3월 21일 생애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을 개인적 목적으로 방문했다. 다음날 페이스북에 "어제 국립묘지를 다녀왔습니다"라며 "업무적으로 간 적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기는 처음"이었다고 썼다.

62세 나이에 처음으로 그런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김재익 전 경제수석을 추모할 목적에서였다. 김동연은 "(아웅 산 묘소 폭파 사건 당시) 저는 경제기획원 초임 사무관이었습니다"라며 "철학과 실력, 소신 그리고 '인간 김재익', 들을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라고 한 뒤 "아웅 산 순직자 묘역 김재익 수석 묘에서 제법 있다 왔습니다"라고 썼다. 김동연은 "존경의 염을 표하고 싶었고, 후배들이 잊지 않고 있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었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이런 찬사를 들을 정도로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기게 된 것은 그가 선을 자주 넘은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능력과 열정이 출중해서인지 그는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학자의 길을 걷다가 관료로 변신하더니 종국에는 정치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군인들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할 정도로 신속히 기반을 굳혔다. 1980년부터 전두환 군부의 핵심 브레인인 허화평·허삼수와도 경쟁관계를 가졌다. 학자 출신의 경제 관료가 낯선 정치 분야에 들어가서도 능력을 한껏 발휘했으니, 전설적 인물로 남을 만도 했다.

관운이 열리다
 

버마 아웅 산 사건의 순국자들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저녁식사 후 커피를 들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좌로부터) 김재익 수석,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한 과기처 차관. 이들 모두 1983년 10월 9일 아웅 산 폭파 사건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 연합뉴스

 
김재익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 11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외교학 전공)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 직원이 된 1960년부터 대학원 공부를 병행해 26세 때인 1964년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경제학으로 전향한 것은 그 뒤였다. 1966년 하와이대학에 진학해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부는 석사 취득 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8년부터 스탠퍼드대학에서 통계학 석사 과정을 이수한 뒤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3년인 그해에 한국은행에 복직했지만, 9월부터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하게 됐다.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훗날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부총재가 된 김용환 경제수석이 그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승철·이완배의 <김재익 평전>은 "(행정고시 출신의) 정통 관료인 김용환에게 한국은행 출신의 김재익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974년 9월 남덕우 전 서강대 교수가 경제부총리가 되면서 김재익의 관운이 열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다르지만 학문적 인연이 있어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남덕우가 부총리가 된 다음 달, 김재익은 장관비서실장으로 기용됐다. 뒤이어 경제기획관과 기획국장(1976년)을 거치면서 핵심 실세로 자리 잡았다. 공무원 시험 출신이 아니면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획하는 요직에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 정권 후반부터 두각을 보인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2·12 및 5·17 쿠데타에 이어 5·18 광주 학살을 자행한 직후인 1980년 6월 군사정권의 경제 책임자로 발탁됐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이 된 것이다.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을 몰아내고 청와대에 들어간 그해 9월, 그는 경제수석비서관이 됐다.

김재익은 자유주의 경제를 신봉했다. 자본가들의 자유로운 시장 참여로 경제가 작동하는 그림이 그의 이상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에 개입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설계하다시피 하는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거기서 배태된 전두환 정권 역시 그의 소신과 일치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광주 학살 직후에 국보위에 가담했다. "김재익은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사람"이라는 뒷말들이 있었다고 <김재익 평전>은 말한다.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김재익은 능력만큼 열정도 넘쳤다. 가슴에 담아둔 꿈과 비전에 비해 그것을 현실화시킬 정치적 수단이 거의 없었던 그는 전두환의 힘을 빌려 자기 의지를 구현시키고자 했다. 대학생인 아들이 "아버지는 왜 독재정권에 협력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하자 김재익은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독재를 견제하고자 그들과 함께하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김재익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김재익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답했다.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 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아빠가 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해, 김재익은 세상이 전두환의 딱딱하고 차가운 인상을 겁내던 시절에 전두환을 이용해 자기 뜻을 실현시키려고 한 대담한 야심가였다. 이는 전두환을 이용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또 다른 야심가들인 허화평·허삼수의 견제를 불러왔다.

허화평은 보안사령부 사령관비서실장으로서, 허삼수는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으로서 전두환의 정권 찬탈을 기획했다. 전두환은 이들의 조언에 따라 움직였다. 1994년 1월 30일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72'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 초기의 청와대 고위 인사는 "전 대통령 주변의 최고 실력자는 허 보좌관이었습니다"라며 허화평의 위상을 평가한 뒤 "그는 말이 보좌관이지 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일에 관여했어요"라고 말했다. 

이 정도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허화평·허삼수가 볼 때 조만간 펼쳐질 나라는 전두환의 나라이기보다는 자신들의 나라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전두환의 참모들이었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자신들의 위상은 그보다 훨씬 위였다.

그런 허씨들이 볼 때 12·12, 5·17, 5·18이 다 끝난 뒤에 합류한 김재익 같은 관료 출신들은 '굴러들어온 돌'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전두환이 '창업 공신'인 자신들과 거리를 두면서 김재익 등을 '수성 공신'으로 만들려 하는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이런 상황은 두 허씨가 김재익 공격에 나서도록 했다. 김재익 출현 이전만 해도 누구보다 열렬히 개혁을 외치는 듯했던 허화평은 김재익이 금융실명제를 주도하자 누구보다 열렬히 변화를 반대하고 나섰다. 

1981년 12월 24일 자 <경향신문> 3면 기사는 허화평을 두고 "개혁의 의지가 투철"하며 "포용력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재익 앞에서 그는 변화를 열렬히 거부하는 사람이 됐다. 또 포용력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대통령 전두환이 강경식 재무장관 및 김재익 수석과의 은밀한 논의 끝에 1982년 7월 3일 '예금실명제 내년 실시'를 전격 발표하자, 허화평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금실명제를 반대했다.

허화평은 자기 혼자만 반대하는 게 아니라 반대론자들을 규합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1994년 2월 6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73'은 "(평소) 내세우는 개혁론에 비추어보면 이상스러운 일"이었다고 허화평의 당시 행동을 평가한다.

김재익과 허화평·허삼수의 경쟁 관계는 보통 때 같았으면 후자의 승리로 끝나기 쉬웠다. 쿠데타 공신이며 군사정권 대주주인 허화평·허삼수를 김재익이 당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명석하고 출중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두환이 김재익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전두환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사실상 전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전두환을 확실한 자기 편으로 만든 것이 김재익이 살아남는 원동력이 됐다.

전두환의 굳은 신임에 더해 허씨들의 '전선 확대'도 김재익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허씨들은 김재익 같은 친위 관료그룹뿐 아니라 전두환의 처가인 이순자 집안까지도 견제했다. 이로 인해 두 허씨의 전선이 확대됐고, 이순자 집안이 총력 대응에 나서는 양상이 나타났다. 전두환은 처가 쪽을 편들었고, 두 허씨는 1982년 12월 청와대를 나가게 됐다(관련기사: 쓰리 허와 이순자족 http://omn.kr/1stbb).
  
이로 인해 김재익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경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그에게도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1983년 10월 9일 아웅 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 그의 인생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국회 문공위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이광표 전 문공부 장관. 허삼수 전 청와대 비서관. 이수정 전 문화공보부공보국장. 허화평 전 청와대 보좌관(왼쪽부터)이 80년 언론통폐합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1988.11.23 ⓒ 연합뉴스

  
노동자 탄압정책 이론으로 뒷받침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김재익은 정통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겠다는 신념을 갖고 경제를 운영했다. 전두환 시절의 경제는 '경제 대통령 김재익'의 작품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아웅 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그가 상당히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재익에게 쏟아지는 격찬들을 보면서, 중요한 뭔가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경제정책에 담긴 함의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재익이 경제를 담당한 기간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일어나던 때였다. 국가의 공공적 기능보다는 기업의 자율성이 중시되는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바로 그 시대부터 일어났다. 

지난 6월 <경제와 사회> 제130호에 실린 박찬종 광운대 교수의 논문 '한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기원'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전환은 경제 안정화 조치가 단행된 1979년으로부터 외환위기가 발발한 1997년 직후의 구조조정기에 이르는 2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 뒤 "김재익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책 관료의 등장과 이들이 주도한 경제 안정화 조치를 한국 신자유주의 전환의 주요 계기로 파악"하는 다섯 학자들의 연구를 소개한다. 

신자유주의가 한국 대중의 삶에 끼친 영향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기업과 재벌의 힘을 지나치게 강화시켜 양극화를 초래한 주범이다. 군부독재정권의 힘을 빌려 신자유주의를 부식시킴으로써 그것의 부정적 측면이 보완될 여지를 상당부분 가로막은 데에 대해 김재익이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또 전두환 정권의 물가안정 정책과 관련해서도 김재익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정권은 물가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주체들을 설득할 만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다. 임금 인상을 막고자 노동자들을 억압한 결과였다. '저임금'이 '저물가'의 요체였던 것이다.

김재익이 죽고 닷새 뒤에 발행된 1983년 10월 14일 자 <경향신문> '고 김재익 경제수석의 마지막 연설'은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론가에 가까우면서도 저물가·저금리·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그의 정책 신념은 제5공화국 경제정책의 기둥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 왔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에서도 나타나듯이, 전두환 정권이 저물가를 관철한 비결 중 하나는 저임금이었다. 노동자 억압이 전두환식 물가안정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이런 노동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 바로 김재익이었다. 반인권적인 노동운동 탄압을 집행한 쪽은 전두환이지만, 전두환을 이론적으로 움직인 것은 김재익이었다. 전두환의 노동 탄압이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 김재익 역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허화평·허삼수와의 경쟁을 전두환의 힘을 빌려 비켜 갔듯이, 김재익의 경제 구상 역시 전두환의 권력 지원에 힘입어 구현됐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악정과 실정에 대해 김재익 역시 적지 않은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철학과 실력, 소신 그리고 '인간 김재익', 들을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라고 찬사를 보낼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학자적으로 훌륭한 것과 역사적으로 훌륭한 것의 차이는 구별돼야 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