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턴 엄마의 하루하루를 화양연화로 살아."

화양연화를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애처로워하는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다 못해 눈물이 고였다. 이 나이에 드라마를 보고 눈물이라니. 

나는 드라마를 정말 좋아한다. 드라마에 울고 웃으며 나의 청춘을 보냈다. 모르긴 몰라도 공감 능력치가 다른 사람들의 두 배쯤 되는 나는 드라마에 빠져 아마도 인생의 많은 기회를 날렸을 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서니 더는 인생을 허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무식한 방법인 줄은 알지만 (아이들의 빗발치는 성화와 남편의 어이없음을 뒤로하고) 용감하게 티비선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이 스마트한 세상에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 티비 뿐이겠는가. 나는 폰에서도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모든 앱을 지우고 나서야 드디어 드라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국민 모두가 좋아하니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지만 이 드라마가 국민 드라마인 이유는 아마도 그 흔한 복수 코드 하나 없는 착한 드라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우리 곁에서 일어날 것 같은 일을,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만나 소소한 에피소드로 이어가는 드라마. 선한 영향력을 마구마구 뻗치는 이 드라마의 장르는 아마도 의학드라마가 아닌 명품 휴먼 다큐 음악 드라마쯤 되지 않을까.

휴머니즘이 예능을 입고 드라마가 된 이 명품 휴먼 다큐 음악 드라마의 시즌 1이
끝나고 앱을 지운 나는, 시즌 2가 시작되고 6회가 지날 무렵 다시 앱을 깔았다(자고로 드라마는 정주행이 꿀맛). 그리고 그렇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나의 메말라버린 가슴을 도로 뛰게 하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내 인생의 단비가 되었다.

지난 8회에서는, 치매가 의심되는 정원의 엄마와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송화의 엄마, 겨울의 엄마,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인 고령의 환자 두 명의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치매를 의심한 정원의 엄마는 수두증으로 판명되자 안도한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해 보면 나이 들어버린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아마도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이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이 또 자식이라 세상 누구보다 친절한 의사인 송화조차도 엄마의 자잘한 관심과 수다가 조금은 버겁다.

아마 가장 편안하고 가장 믿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소홀할 수 있는 관계가 모녀 사이일 것이다. 엄마의 파킨슨 진단 소식을 듣고 나서야 엄마의 소소한 전화 통화를 끝까지 들어주는 송화를 보면서 엄마의 자리가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프다는 연락이 있어야 비로소 딸의 시간을 차지할 수 있는 존재. 그 시간조차 당당하게 갖지 못하는 '엄마'라는 자리.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건 평소에 까칠한 성격의 딸과 아들이 엄마의 갑작스러운 병 소식에 '돌아온 탕아'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엄마가 늘 그 자리에 있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정원과 송화의 마음 속에 일렁인, 어쩔 수 없는 후회가 전해져왔기 때문이었다.

정원과 송화처럼 전문직을 가지고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나도 늘 나의 엄마가 뒷전이다. 급한 일이 있을 때면 아직도 늘 엄마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마흔 줄의 나이건만,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엄마를 살필 여유가 없다. 아마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나는, 엄마가 그 자리를 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난 엄마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정원의 이 대사는 아마 세상 거의 모든 자식들의 보편적인 마음이 아닐까 싶다. 엄마를 위해 내어줄 시간은 부족하고, 그러자니 나를 바라보는 엄마가 버거워 뒤늦게 엄마의 시간을 가지라고 등 떠미는 이 세상의 아들딸들. 엄마들이 자식을 두고 이기적일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사실 나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엄마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참 가슴 아프게 들렸다.

그러나 나의 엄마도, 정원의 엄마도 송화의 엄마도, 아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결코 엄마를 향한 마음이 덜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슬기로운 명품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두 엄마들은 아마 그렇게 정원과 송화의 후회를 이해로 보듬을 것이고, 거기에 나는 또 위로를 받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부모 자식의 시간, 그 속의 화양연화는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닐까.

"동물은 평화롭고 생선은 푸르며 사람은 애처롭다."

시인 김소연의 책 <한 글자 사전>에서 정의한 '등'을 읽고 있노라면 엄마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오늘치 애처로움이 마음의 빚으로 담기니 오늘은 엄마에게 긴 안부를 물어야겠다. 어느새 마음보다 앞선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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