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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한창 사춘기를 겪던 시절, 하필이면 부모님의 사이가 안 좋았다. 갑작스레 생긴 사정으로 하루인가 이틀인가 결석을 하고 학교를 갔고, 때는 한문 시간이었다.

당시 한문 선생님은 남학생들을 유독 티 나게 좋아하셨고, 이름을 외우는 건 학교에서 유명했던 학생 몇과 공부 잘 하는 학생들 몇뿐이었다. 여느 한문 수업 시간과 다를 것 없는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한문 선생님이 뜬금없이 "부모님의 이혼은 서로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부모님에게는 각자의 인생이 있고, 너희는 너희의 인생이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내가 결석한 사정을 담임 선생님 외에 누군가 알 만큼 난 존재감이 있는 학생도 아니었고, 괜히 혼자 찔려 얼떨떨했다. 하지만 한문 선생님이 무심코 하신 그 말씀은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복잡한 세상에 정신을 못 차리고 끌려 다니던 사춘기 소녀는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사람 각자 모두에게 각각의 인생이 있음을 깨달았고, 나는 그냥 내 삶을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 되는 거였다.

"지친 몸을 잠시 의자에 누이도록 해준 것은 특별히 선하거나 자비롭지 않은 한 인간이 건넨, 별것 아닌 호의였다"(p18) 본문의 첫 글을 읽자마자 중학교 때의 한문 선생님이 생각났을까.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한 학생의 방황이 염려되어 한 공개적인 조언은 위로를 넘어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가 되었다는 사실을 한문 선생님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혀 모르실 테다. 물론 한문 선생님이 아무런 의도 없이 그냥 하신 말씀일 수도 있다. 별 뜻 없이 한 말이 한 사춘기 소녀에게는 별게 아닌 게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이소영 교수의 책 <별것 아닌 선의>는 거창한 인권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처럼 기억 속 어딘가에 묵혀 있던 장면들이 깜짝깜짝 떠오른다.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분명 '별게' 아니었던 순간들 말이다.

며칠 전, 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인성교육 연계활동으로 잠비아에 있는 아동들과 그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금 모금 안내문과 활동지를 보내왔다. 아이 둘과 함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안내문을 보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일을 하고, 그럼에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잠비아 아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밥이 없으면 슈퍼에 가서 과자를 사먹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7살 둘째 아이와 어린이가 학교를 가지 않고 노는 게 아니라 일을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제는 제법 '말'이 통하는 10살 큰아이와의 간극이 좀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서 또래의 아동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함께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뜻깊었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깊은 불편함이 있었다. 필자가 어릴 때에도 소말리아의 아이들이 뼈만 남은 모습을 한 사진이 붙어 있는 '사랑의 빵' 저금통에 동전을 한가득 채워서 학교에 제출하곤 했기 때문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왜 지구 한편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굶어 죽어갈까. 구조적인 모순들과 문제들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우리 집 아들 둘이 어리다.

유치원에서 보내온 안내문에는 5천원이면 한 가족이 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옥수수가루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올해 초 심한 장염을 앓아 깊은 배고픔을 느껴본 큰 아이는 덜컥 만원을 내놓았다. 평소에 자기 돈은 절대 한 푼도 쓰지 않는 아이였다. 무엇이 짠돌이 큰 아이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을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보다 조금 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선의'이다.

저자 이소영은 '개인의 온정에 기대어 유지되는 공동체의 온기는 체제와 자본의 모순을 도리어 은폐할 수 있다'는 논지에 대해 '찰나의 선의는 그 자체로 귀하며,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p103) 그렇다고 이 '선의'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종착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선의'의 다음에는 이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의와 냉소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절실함과 분노가 모여 우리네 삶이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없는 분노는 힘이 없다. 그것이 '선의'가 아닌 것과 만나면 분노는 방향을 잃고 혐오로 변질 될 수 있다. 간혹 우리의 운동에 '사람'이 안 보일 때가 있다. 원칙과 당위성, 이론이 완벽한 삼합을 이루지만 무언가 텅 비어 보일 때가 있다. 원칙 혹은 분노에 의해 '사람'이 가려지곤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운동은 사람에 의해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인데 말이다.

활동을 그만두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내 주변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나의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데 가끔 인권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우와.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혹은 "좋은 일 하셨네요"라고 반응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아니에요. 별거 아니에요."라고 답을 했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비하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내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에게는 각자 선택한 삶과 인생이 있고, 나는 그저 내가 선택한 곳에 서있는 것 뿐이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마치 한문 선생님이 별거 아닌 듯 인생의 조언을 남겨준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별게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별것 일수도 있는 세상. 마치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잠시 삐꺽 거리면 별것 아닌 선의로 수리를 하고, 연민과 동정을 품은 분노로 아주 조금씩 좋은 쪽으로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거금 만원을 흔쾌히 기부한 큰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은 세상을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우리가 누군가를 돕듯이 우리도 나중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고. 그럴 때에는 흔쾌히 그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 우리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면 된다고 말이다. 내 말을 이해했을지는 모르겠다. 아프리카에 사는 친구들이 집에 정수기를 두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둘째 아이와도 언젠가 이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싶다. 좀 뻔한 말이지만, 세상은 선한 사람들의 편이라고 난 여전히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배여진님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이사입니다.


별것 아닌 선의 -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

이소영 (지은이), 어크로스(2021)


태그:#별것아닌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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