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1 11:29최종 업데이트 21.09.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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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편집자말]

   

 
19

아득령에서 돌아오는 사이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범 가죽을 걷어내 벽에 걸고 유포를 깔았지만 바닥이 눅눅했다.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포수막, 거적문을 걷어 올리고 나는 자욱하게 차오르는 비안개를 굽어보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옆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내 옆에 앉아 나른한 눈을 껌뻑이며 빗소리를 함께 듣고 있어야 할 산돌이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비가 떠나고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산돌이마저 잃었다.

폐를 관통당한 산돌이는 내 품 안에서 파들파들 떨며 피를 쏟았다. 탄환이 관통한 가슴의 양쪽을 손바닥으로 막아 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새하얀 산돌이의 털을 붉게 물들인 피가 내 무릎을 흥건히 적시며 흘러내렸다. 심장이 멈추고, 나를 바라보던 산돌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신포수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산돌이를 죽인 산적포수를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신포수에게 총을 빼앗긴 나는 놈에게 그대로 돌진해 면상을 이마로 들이받았다. 뒤로 나자빠진 놈을 올라타고 뭉개진 얼굴을 마구 가격했다. 얼마나 때렸는지 팔에 힘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적막 속에서 개들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향산이는 산돌이의 머리와 몸통을 주둥이로 떠받쳐 올리며 일으켜보려고 안간힘을 썼고, 귀가 처진 풍산개는 죽은 형제의 얼굴에 코를 박은 채 낑낑거렸다. 인간들은 말이 없었고,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신포수와 산적두목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산적두목이 산적포수를 타고 앉은 내게 무표정하게 물었다.

"이제 됐냐?"
"병신들! 죽어버렸는데 되긴 뭐가 돼!"
제 두목에게 욕을 퍼붓는 나에게 산적 하나가 달려들려고 했다. 그놈의 뒷덜미를 잡은 산적두목을 노려보며 나는 되씹었다.

"병신새끼들!"
그래보아야 죽은 산돌이가 다시 살아날 리 없었다.

산돌이를 잃고 압록강행도 포기하고 강막골산으로 돌아온 나는 말을 잃었다. 아침에 떠오른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아울에게 패배한 신포수도 사냥에 아무런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통나무벽에 기대 권련을 태우던 신포수가 뒤에서 물었다.

"넌 불질을 계속하고 싶으냐?"
"..."

총을 다루는 건 여전히 좋았지만 피를 보는 일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적포수에 대한 적의는 사라지고 나를 자책하게 되었다. 내가 조금 더 왼손에 익숙해서 아울의 단단한 이마가 아닌 급소에 탄환을 박았다면 산돌이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신포수가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과감하게 몸을 내밀고 오른 손으로 한 방을 더 제대로 먹였다면 산돌이가 더 쫓아가야 할 일도 없을 것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산돌이가 숨을 멈추던 마지막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뛰고 있던 심장이 서서히 멈추던 기억은 머릿속보다 내 손바닥에 더욱 강렬하게 남아 총을 잡기 어렵게 만들었고, 이젠 토끼 한 마리도 제대로 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짐승을 짐승으로 여기지 않으면 포수질 못한다. 산돌이도 짐승이고."
나는 벽에 기대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궐련을 입에 문 채 그는 포수막의 낮은 천정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왜 사냥 나가지 않아요?"
포수막 밖은 비안개 자욱했고 포수막 안은 권련 연기 자욱했다.

"장마잖아."
하늘이 갠 날도 총을 잡지 않았던 신포수였다.

"비 그치면 나갈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포수막에 쌓인 양식을 둘러보았다. 지난 장날 산을 내려가 여우털가죽과 바꿔온 쌀과 소금, 된장이 아직 넉넉했다. 그것도 새로 사냥한 것이 아니라 지난해 잡아서 말려둔 것이었다. 양식은 장마가 한 달은 계속되어도 걱정할 게 없었다.

"내가 사냥을 나갔으면 좋겠냐?"
"그거야 아저씨 마음이지요."
"내 마음?"
권련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신포수의 고갯짓은 갸웃거리는 것인지 가로젓는 것이지 애매했다.

"난 그거 내 마음 아닌 거 같은데..."
"포수로 살아가려면 사냥을 해야 하고, 사냥을 하면 한 마리라도 더 잡아야 하잖아요."
"왜?"
"농부는 농사를 짓고, 어부는 고기를 잡고, 사냥꾼은 사냥을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게 정말 같은 걸까? 농부가 논에서 벼하고 같이 살고,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들과 같이 살아? 사냥꾼은 산에서 짐승들과 같이 살아. 농부와 어부들은 사람의 질서 속에서 살지만 사냥꾼은 짐승들의 질서 속에서 사는 거야. 산이 내게 내주는 몫만큼 잡는 거지. 여우에게는 여우의 몫이 있고, 늑대에게는 늑대의 몫이 있고, 범에게도 범의 몫이 있듯이."

"그 몫이 대체 얼마예요?"
"먹고 살 만큼. 여우도, 늑대도, 범도 그 이상을 사냥하지는 않아. 나도 여우나 늑대, 범처럼 내 몫 만큼 사냥을 하며 이 산에서 짐승의 하나로 살아가는 거야. 그게 짐승의 질서고, 산돌이도 그 질서 안에서 죽은 거야. 범에게 잡혀 먹혀 마땅한 늑대도 없고, 나에게 죽어 마땅한 범도 없어. 그 반대로, 여우에게 잡혀 먹히지 말아야 할 토끼도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 말아야 할 여우도 없는 거야."

"산돌이는 늑대도, 호랑이도 아닌 우리 편인 포수한테 죽었어요."
나는 신포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산돌이가 늑대나 호랑이에게 당했더라도 슬프고 쓰라리긴 마찬가지였겠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 사냥꾼에게 죽지 말아야 할 사냥개도 없는 거야. 사냥에 패배하고 죽지 말아야 할 사냥꾼도 없고... 그런데 난 살아있네."
신포수는 궐련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언젠가 나도 이 산에서 짐승의 하나로 죽게 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평생 포수로 살아갈 거예요?"
그는 대답을 않고 거적문 앞으로 나와 비안개에 젖고 있는 능선을 바라보았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너는 포수로 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토끼를 불쌍하게 여기는 여우, 여우를 불쌍히 여기는 늑대, 늑대를 불쌍히 여기는 범은 산에서 살 수 없다. 짐승에게 연민을 가진 포수도 산에서 살지 못하는 거다."

신포수의 뒷말은 포수막에서 떠나라는 소리로 들렸다. 당황스러웠다.

"전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있을 것 같다."
내가 산을 내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머슴질뿐이었다.

"전 도적놈이 될지언정 종으로 살진 않을 거예요. 살인범이 될지언정 절대 아비처럼 살다가 죽진 않을 거라구요, 난."
"네 아비는 종이 아니었어!"
신포수가 벌컥 화를 냈지만 나도 지지 않았다.

"머슴이나 종이나, 종처럼 살면 그게 종이지요."

신포수는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네 어미를 살리려고 종처럼 엎드렸고, 너를 지키려고 종처럼 살다가 죽었지만 종은 아니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종처럼 살지 않으려고 한 번은 목숨을 걸었고... 패배한 민란에 따라나섰던 포수는 산으로 오면 되었지만, 맨손의 말단 살수가 달리 어떻게 제 여자와 제 새끼를 지킬 수 있었을까..."

신포수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산돌이를 죽인 산적포수를 죽이려들던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어쨌든 이제 제가 다룰 줄 아는 건 총뿐이에요."
"그러니까, 총을 다루며 사는 다른 방법이 있다지 않느냐."
"?"
"군영. 지난 장날 감영에서 내다붙인 방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군영에 들어가라."

양식을 바꾸러 내려간 지난 장날, 장터 초입에는 세 개의 방이 붙어 있었다. 두 개는 언제나 붙어있는 세금 통고문이었다. 나라에 바치는 세금과 감영에 바치는 세금. 새롭게 하나 더 붙은 게 군병 모집 방이었다.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친군을 평양감영에 신설하고, 거기에 들어올 장교와 병정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장교는 어차피 남의 일이라 병정의 자격을 눈여겨보던 나는 말미의 자격조건을 보고 고개를 돌려버렸었다.

"널 사격으로 이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솜씨를 받아줄 곳은 군영뿐이다. 거기선 짐승 피를 보지 않아도 되고."
"열일곱 살 이상이라는 자격 조건 못 봤어요?"
신포수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 되물었다.

"이미 지난봄에 열일곱 살이 된 거 아니었어?"
나와 신포수는 오랜만에 서로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부족하면 오늘 저녁에 한 살 더 먹던지."

  
20

마침내 신포수와 헤어질 날이 왔다. 이른 아침을 먹고 나는 포수막을 출발했다. 이슬이 바짓단을 적셨다.

"범아."
"?"
나는 뒤따라오는 신포수를 돌아보았다.

"제 이름도 못 알아들으면 되겠냐?"
신포수는 병정 지원서에 열일곱 살, 양인 홍범으로 나를 접수시켰다.

"아, 예."
"이제 사냥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일러준 포수의 철칙을 잊지 말아라. 군대에 들어가면 언젠가는 짐승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짐승을 상대해야할 날이 올 거다."

신포수는 내가 산을 내려가기로 한 날부터 산과 계곡으로 데리고 다니며 밤낮으로 나를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확인했다.

"포수의 5대 철칙이 뭐라고 했었냐?"
"지피지기가 첫 번째고, 그 다음이 추격필포, 과감무쌍, 일격필살, 마지막이 산야일체지요."

어제, 마지막으로 가르쳐준 게 산야일체였다. 신포수는 사냥의 마지막 승부는 산야가 결정한다고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모두 사람의 일이지만 마지막 다섯 번째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산에서는 인간도 짐승들 중에 하나일 뿐이야. 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산야가 내편이 되어주어야지."
"어떻게요?"
"어떻게... 기러기의 비행고도와 꿩의 잠자리는 내일 바람의 방향과 비의 양을 알려주고. 노루와 멧돼지의 철수 시간은 모레의 이동계획을 예고해주지 않니. 산세와 지형, 하늘의 움직임을 알고, 내가 그 산야의 일부가 되면 산야는 내 편이 되어주지."

어느새 우리는 3부 능선까지 내려왔고 작별의 순간이 왔다. 낭림산맥의 언덕과 계곡, 풀과 나무는 물론이고 해의 기울기와 바람의 방향까지 읽어내던 신포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와 네 아비는 민란의 막내 포수와 살수로 만나 패배하고 굴복하였지만 아무도 배신하지는 않고 살았고, 죽었다. 네 아비는 구차했지만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았다. 너도 잘 살아라."
신포수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저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울을 따라 낭림산맥과 태백준령을 오가겠지. 낭림이와 산돌이의 복수는 내가 해줘야지. 아울에게 박아둔 탄환도 찾아와야 하고."

"아득령으로 가세요. 아주머니가 기다리잖아요."
신포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 포수막은 떠나겠지만 사람의 세상으로 가지는 않는다. 포수로 짐승의 질서 속에서 살다가 어느 산자락에선가 죽을 것이고, 짐승의 먹이가 되겠지. 그래야 공평한 것일 테니까. 이왕이면 호랑이의 먹이면 좋겠지만 하이에나라고 해도 아주 나쁘진 않을 거 같아. 가라."
나는 들고 있던 화승총을 신포수에게 돌려주었다.

"이 총은 범 바위 아래 묻어두마. 다시 찾아갈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신포수가 내 총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나는 그의 등을 향해 물었다.

"우리 여단은 이것으로 해체인가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우리 여단은 이제... 두 개의 여단으로 분리한다."

그는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했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열다섯, 아니 열일곱 살에 완전한 단독자가 되었다. 신포수는 나를 한 개의 여단으로 독립시켰다. 나는 아침 이슬에 젖은 바짓단을 이끌고 멀어져가는 한 개 여단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덧붙이는 글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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