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30 13:03최종 업데이트 21.09.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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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둘째는 없다 생각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남편은 말했다. 인공 자궁만 있으면 자기가 둘째 낳고 싶다고. 도저히 나한테 그 과정을 다시 겪으란 말은 못 하겠다고. 그러자 내 대답. "낳는다고 끝이 아니잖아."

아이를 낳은 지 만 5년, 이제 좀 살 것 같은데 길거리에서 꼬물꼬물 3등신 아이들을 보면 속절없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여물지 않은 발음으로 부지런히 의사 표현을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귀여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만약 둘째가 생긴다면?' 생각했다가도 아래와 같은 헤드라인을 보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게 된다. 


"출산시 1년간 월 100만 원 부모급여 지급"(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만 5세까지 매달 100만 원 양육비 지급"(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부모 모두 3년씩 육아휴직 제공"(유승민 전 의원)
"만 5세까지 전면 무상보육, 부모 육아휴직 3년 제공"(윤석열 전 검찰총장)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발표한 저출생 대책 공약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이낙연 전 대표는 "출생률로 업적을 평가받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고, 국민의힘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제2호 공약으로 보육 공약을 내놓을 정도로 인구 절벽에 대한 위기감은 높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 필요한 것 
 

‘만약 둘째가 생긴다면?’ 생각했다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세차게 흔들게 된다. ⓒ unsplash

 
경제적 부담 때문에 비출산을 다짐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정도 돈을 준다고 아이를 낳겠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결혼하면 1억, 출산하면 1인당 5000만 원"(허경영 국민혁명당 명예대표)을 준다 해도 결론은 같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만 필요한 게 아니다. "돌봄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정의당 대선후보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들한테는 얼마를 줄게, 아이를 한 명 더 낳으면 어떤 걸 더 보상을 해줄 게 이런 게 급하지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를 포기해야 되는데 이것 때문에 내 삶의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항상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자신의 하나의 정체성인데 뭐를 포기해야 이게(출산과 육아) 가능한 상황에서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야 이 저출생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건 일도 육아도 모두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서로 호흡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투입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일과 달리 육아는 불규칙 투성이다. 육아 휴직 복직 후, 아이가 얼마나 자주 병원에 가는지 세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애가 아파서, 애가 다쳐서'라는 이유로 갑자기 사무실에서 사색이 되어 사라지던 여자 선배들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육아에는 도무지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 가득하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진다면 과연 아이를 낳을까? 윤석열 전 총장은 부부 합산 3년, 유승민 전 의원은 부부 합산 6년 육아휴직 보장을 공약했다. 특히 2017년 당시 '육아휴직 3년'을 1호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민의힘 대선주자 유승민 전 의원은 이번에도 부모 모두에게 육아휴직 3년을 보장하고, 자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3회에 걸쳐 나눠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공약을 내세웠다. 육아휴직 급여를 인상해 육아휴직 2년 차, 3년 차에도 통상임금의 일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대체 인력은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다. 

육아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사회, 환영한다. 문제는 육아의 부담과 육아휴직 사용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쏠려 있는 현실이다. 

육아휴직 '기간'만 늘린다면 

출산휴가 3개월+육아휴직 1년. 육아에만 전념하다 회사로 돌아갔을 때를 기억한다. 고작 1년 3개월 업무에서 멀어졌을 뿐인데 업무 감각을 다시 찾는 데 시간과 노력이 꽤 필요했다. 조직에 다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일-육아 병행이라는 처음으로 해보는 '일'도 새롭게 배워야 했다. 아이에게 늘 미안하면서도 이러다 직장에서 뒤처지는 게 아닐까, 동료에게 민폐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길 때면 이렇게 계속 일을 할 수 있을까 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육아휴직 기간이 길어진다는 건 복직 후 불안감과 혼란도 그만큼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아휴직 복귀 후 아이를 맡길 보육기관이나 보조 양육자를 구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일은 여성의 일로 인식된다. 조직에 다시 적응하는 것 또한 여성의 일이다.

모든 책임을 개인이 떠안아야 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일-육아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18~2020년 육아휴직자 중 34.1%가 육아휴직 복귀 후 받을 수 있는 육아휴직 사후지급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육아휴직자 3명 중 1명이 일터로 복귀하지 못한 것이다.

육아휴직을 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9년 출생아 부모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21.6%이었다. 여전히 5명 중 4명은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여성 육아휴직 사용자는 6만4851명,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는 4012명. 여성의 육아휴직 사용률은 63.6%, 남성은 1.8%였다. 

법으로 정한 1년 육아휴직도 쓰기 어려운 현실, 여성이 절대적으로 육아휴직을 많이 쓰는 상황을 개선하지 않은 채 육아휴직 기간만 늘린다면 여성의 부담은 오히려 커진다. 육아휴직을 쓸 가능성이 있는 직원을 사측에서 기피하는 현상 역시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아이'만 있고 '여성의 삶'은 없는 정책

지난 6일, SBS는 남양유업이 육아휴직 복직 이후 돌아온 여성 팀장에게 기존 업무와 관련 없는 단순 업무를 부여하고, 물류 창고로 인사 발령을 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녹취록에는 "빡세게 일을 시키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강한 압박을 해서 지금 못 견디게 해", "위법은 하는 건 아니지만 한계 선상을 걸으라 얘기야"라고 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게 정말 2021년 뉴스가 맞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엄마를 대상으로 분유를 팔아 돈을 버는 회사가 엄마 노동자의 육아휴직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 화나고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 

현금 지원과 육아휴직에 집중한 대선후보들의 저출생 대책에는 아이만 있을 뿐 여성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가족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육아휴직 이후에도 육아는 계속된다. 육아휴직을 의무화 하는 것도, 기간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돌봄 분리가 아닌 일-돌봄 양립이 가능할 수 있는 촘촘한 제도와 문화가 더욱 시급하다. '이거 주면 애 낳을래?'가 아니라 저출생 대책은 반드시 성평등 정책, 노동 정책과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유승민, 윤석열, 홍준표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9월 28일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대선 경선 예비후보자 4차 방송토론회에서 방송 준비를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 아이 낳는 정책에 열심히인 유승민 전 의원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아이러니하다. 아, 물론 여성 정책 발표하겠다고 기자회견까지 잡아 놓고 갑자기 연기한 홍준표 의원 같은 후보도 있지만 말이다. 여성을 단순히 아이 낳고 키우는 대상으로만 본다면 출생률이 높아질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둘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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