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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온라인 쇼핑몰에 올라온 한 구매 후기를 보고 당황했다. 주문자가 식사대용 영양 바를 24개 주문했는데 상품이 한 개씩 각각 다른 상자에 담겨 온 상황이었다. 후기의 사진 속에는 스물네 개의 종이상자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상자를 정리하는 수고도 아깝지만 낭비되는 자원과 넘치는 쓰레기를 어찌할꼬. 저걸 다 들어 나른 사람들의 수고는 또 어찌할꼬. 나마저 답답하고 허탈했다.

해당 쇼핑몰에서 상품 포장 일을 하는 내 친구의 설명 이러했다.

"한 명이 24개를 넣어 포장하는 것보다 1개를 24명이 포장하는 것이 빨라. 발송 시간 맞추는 게 빠듯하니까."

세상에. 이게 사실이라면, 한 명의 실수가 아니라 당일배송, 새벽배송 등 과하게 빠른 서비스와 배달문화가 문제였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여러 브랜드 제품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만 배송하는 스타트업도 있다고 하지만, 기업들은 대부분 '배송은 빠를수록 좋다'고 여기는 문화에 발맞춘다.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서까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 말이 참 맞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한 소설 <천 개의 파랑>은 작가가 적어둔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설 <천 개의 파랑> 책을 손에 넣은 것보다 작가의 인터뷰를 듣고 강의 영상을 찾아본 것이 먼저였다. 많지 않은 나이에 겪은 지난한 삶의 이야기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꾸는 굳은 지향이 마음을 끌었다. 이런 사람이 쓰는 책은 대체 어떤 책일까.
▲ 소설 <천 개의 파랑> 책을 손에 넣은 것보다 작가의 인터뷰를 듣고 강의 영상을 찾아본 것이 먼저였다. 많지 않은 나이에 겪은 지난한 삶의 이야기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꾸는 굳은 지향이 마음을 끌었다. 이런 사람이 쓰는 책은 대체 어떤 책일까.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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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담은 천 개의 진심

SF 장편 <천 개의 파랑>은 실수로 학습 휴머노이드의 칩이 삽입된 기수 휴머노이드 '콜리', 그리고 경마장과 경마장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콜리는 자신과 호흡을 맞추어 달리는 경주마 '투데이'의 부상을 막기 위해 경기 중 스스로 낙마하여 하반신이 완전히 부서진다. 폐기 처분 위기에 놓인 콜리를 경마장 근처에 사는 고등학생 연재가 우연히 발견하고 고치기로 마음먹는다.

소설의 배경인 2035년은 각종 휴머노이드의 역할이 점점 더 일상 깊숙이 들어와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기술의 혜택도 부의 격차에 따라 갈리는 시대이다. 더 빨리 달리는 말을 보기 위해 기수 로봇을 도입하고, 무리한 달리기에 혹사당해 쓸모가 다한 말을 안락사하는 사회. 기술의 진보가 발전이라 믿고 앞으로 내달리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 그리고 각자의 사연을 소설은 차근차근 비춘다.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164쪽)
 
느린 걸음걸이를 가진 남편이 보경에게 한 말처럼, 세계의 빠른 변화 속에도 모든 이를 챙겨 안고 천천히 나아가려는 작가의 마음이 책 전체에 고르게 배어있다. 그렇기에 속도, 소통, 동물권 등 이 책이 전하는 많은 키워드를 제치고 남는 하나의 단어는 '진심'이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지구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똑같이 감싸 안는 진심이 인물들의 생각과 말속에 뚝뚝 묻어난다. 소설 속에서 은혜는 말한다.
 
"앱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 그래서 저는 앱 업데이트 잘 안 해요. 그냥 할 때마다 찜찜해서." (149-150쪽)

괜찮지 않은 내가, 괜찮지 않은 이들을

주요 인물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로봇을 다루는 데 재능이 있지만 가족의 상황 때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게 된 연재,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하는 언니 은혜, 남편을 잃은 아픔과 그리움을 내색하지 않고 두 딸을 키우며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 보경.

이들은 약점과 상처를 안고 일상을 버텨낸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삶에 만들어낸 균열은 메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고, 이를 감당하는 방식도 서툴기 그지없다.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주변에 짐 지우지 않으려 이를 앙다물고 살아내는 모습. 지금 여기 우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상적인 점은 이들이 변화하는 계기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돕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부서진 기수 로봇 콜리와 안락사에 직면한 경주마 투데이를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서거나, 이 과정에 협력하며 지켜본다. 그것이 그들을 정체된 자리에서 한 발 나아가게 만든다. 타자를 위하는 과정이 자신을 더 '살아있게' 한 것이다. 마치 소설 속에서 로봇인 콜리가 투데이와 합을 맞춰 달리는 느낌을 통해 자신도 호흡을 한다고 여기고, '투데이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행복한 거라고 정의 내렸'듯이.

크고 작은 상처 속에 고립되어 있던 인물들이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씩 자신을 열어 보이는 모습은 인물의 변화로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기에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멈춘 시간 속을 살던 보경은 로봇 콜리와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연재는 자신과 상관없는 세계의 사람이라 여겼던 친구 지수와의 관계를 통해서 '함께 달리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다.

으레 정답을 다 안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툴고 어리석게 행동하게 되는 법. 보경과 연재의 모습에 나를 비추어볼 때 소통이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괜찮지 않은 내가 괜찮지 않은 이들을 돌아보는 것이 자신과의 소통을 먼저 열어주지 않을까.

세상이 강요하는 속도에 지지 않는 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인물들은 어떻게 절묘할 만큼 우연히 엮이는지, 2035년의 인물들이 쓰는 유행어는 왜 지금과 같은 것이며, 인공지능 로봇이 일상화된 시대에 왜 휠체어만 아직 기능이 제한적인 것인지. 각 인물들의 사연에 대해 뚜렷한 갈등 구조 없이 설명적 서술이 이어지는 점이나 인물들의 생각에 작가의 입장이 넘치게 투영된 느낌도 아쉬웠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투데이를 위한 콜리의 선택으로 시작하고 역시 투데이를 위한 콜리의 선택으로 끝을 맺는 수미상응의 구성. 이것은 인물들의 작은 변화를 무심하게 이끌어가는 문체와 대조되며 묘한 매력을 뿜는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 소설이 앞만 보며 세상의 주로를 내달리는 이들에게, 속도를 이기지 못해 낙마한 이들에게, 심하게 달려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된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느낌 그 자체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애달파하고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로 불안해하는 마음을 쓰다듬는 그 손은, 한없이 포근하지만 단단한 힘을 가졌다. 이는 보경이 남편에게 했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83쪽)
 
태어난 이후로 줄곧 빨리 달리는 훈련만을 받은 투데이는 관절염으로 더 이상 빠르게 달릴 수 없게 되자 '주로에 서서도 뛰지 않는 훈련'을 받는다. 자꾸 속력을 내려고 하는 투데이를 민주와 연재, 은혜가 곁에서 달래듯이, 이 이야기가 우리의 등을 가만히 쓸어준다. 무언가를 갖거나 이루려 조바심 내며 살아갈 필요 없다고. 

중력만큼이나 익숙해져 있는 무리한 속도를 우리가 기민하게 감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단지 20대 청년이 물류센터에서 일한 뒤 과로사하고 판매량 예측이 어긋나 죄 없는 전복 500개가 버려졌다는 뉴스를 접할 때만이 아니라, 하루의 모든 선택 안에서 그러하길 바란다. 

콜리가 자주 올려다보던 파란색의 하늘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펼쳐져 있다. 세상이 강요하는 속도에 지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힘을 나누어 받은 느낌이다. 그 단단한 온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의 브런치 페이지에도 게시될 수 있습니다.


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 수상작

천선란 (지은이), 허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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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단단해지지 않아도 좋다는 단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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