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입양할 아동의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사랑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입양할 아동의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사랑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한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나의 딸은 5살까지 보육원에서 살다 1년 여의 구애를 건넨 우리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족이 되었다. 보육원에서 크던 아이를 딸로 맞이한 입양가정이라고 커밍아웃을 할 때면 누구든 그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반한 나머지 '어쩜! 그렇게 아름답고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라고 물어온다.

그러나 10년을 살고 보니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놀라운 러브스토리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 안에 사랑이라는 환상에 눈먼 성인들을 위한 잔혹동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감사하게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시간을 잘 통과해 왔지만 여전히 이 터널에서 힘들어 하는 입양가정을 많이 만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그 사랑이 무참히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거절이 두렵다면 조용히 짝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낫고, 거절을 당하더라도 사랑을 건네고 싶고 이 과정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결심이 선다면 용기있게 전진해 볼 일이다.

입양할 아동의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사랑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부모가 필요하고 사랑에 결핍을 가진 아이라면 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게 당연할 뿐, 그들이 무언가를 거절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애착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

보육시설에서 오랜 시간 성장한 아이들은 새로운 입양부모와 만나도 애착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이에게 애정과 믿음을 형성하며 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발달이라면 이 아이들은 그런 대상을 지속적으로 상실하며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아본 자가 사랑을 줄 수 있듯이 사랑과 돌봄에 결핍이 있는 아동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돌려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와 안정된 애착을 형성해 본 경험이 없는 아이는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관계가 자주 두려울 수 있다. 그동안 경험했던 많은 양육자들은 자신이 마음을 주려할 때 사라졌거나 사랑하게 되면 떠났기 때문에 믿을 사람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음을 배웠다. 오히려 낯선 사람과의 피상적인 관계가 더 편안하고, 자신을 통제하려는 손길 앞에서는 버티고 분노해야 안전하다는 것을 삶으로 체득한 아이들이다. 나는 이 시기의 아이들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시로 뒤덮힌) 선인장 같다고 여긴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안기지만 또 어떤 날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멍하니 서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뾰족한 가시를 잔뜩 내밀어 나를 찌르기도 한다. 부모가 애써 준비한 것들을 보란 듯이 거절하기도 하고, 약속했던 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긴다. 매일 곁에서 애쓰는 부모의 수고는 안중에도 없이 낯선 이의 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고들며 부모의 속을 뒤집기도 한다.

일부러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보호하고 돌보는 과정 가운데 생긴 가시이지만 그것을 받아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쪼개지는 느낌이다. '이게 뭔가' 싶은 날이 이어지고 내가 엄마인지 돌보미 아줌마인지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상황, 과연 우리가 가족으로 녹아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집채 만한 파도처럼 몰려온다.

묵직하고 너그러운 사랑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대개 '첫 눈에 반한', '홀딱 빠져드는' 사랑이었다. 가물가물하긴 해도 지금의 배우자와도 그렇게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내 혼을 쏙 뺄 만큼 사랑스럽던 첫 아이(혹은 첫 조카)와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나를 만족시키는 누군가를 향해 나의 온 열정을 쏟아 붓는 행위, 나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이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힘들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힘이 솟는 비현실적인 황홀경의 상태랄까.

입양으로 만난 큰 아이와의 사랑은 전혀 출발이 다르다. 사랑스럽거나 만족스럽지 않고, 오히려 나를 화나게 하며 시험하는 아이와 의지적인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을 때도, 이게 과연 무슨 소용일까 싶은 순간에도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아이에게 계속 양분을 건네야 한다. 어쩌면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뜨거운 마음이라기 보다 한 어른으로서 아이의 성장에 보탬이 되겠다는 결단에 가까울 수 있다. 다정하거나 뜨거운 사랑은 아니라도 묵직하고 너그러운 사랑을 의지적으로 꺼내는 훈련이 지속될 때 아이는 새로운 가족과 연결될 수 있다.

사랑이 쉽지 않다는 걸 우린 자주 잊는다.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자신을 지탱하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며 나를 확장시켜야 한다. 무너지고 비워진 자리라야 상대를 위한 새 공간과 자리가 마련된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 경계를 확장하는 것은 자아 영역을 넘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다가가 그의 성숙을 도와주는 것 까지도 포함한다'는 스캇펙의 말처럼(<아직도 가야할 길> '사랑은 자아 영역을 확대하는 것' 챕터 중) 의지적인 사랑은 큰 아이 입양을 선택하려는 이들이 도전해야 할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게 하나씩 새로운 정의를 경험하며 진짜 사랑을 배워가는 깊은 터널, 그곳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이 새겨둔 벽면의 고백을 소개한다.

부모는 오래 참고
부모는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부모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부모는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부모는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부모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부모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태그:#입양, #모두의입양, #큰아이입양, #입양가족, #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가족의 연결을 돕는 실천가, 입양가족의 성장을 지지하는 언니, 세 아이의 엄마,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저자, 가끔 예술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큰딸의 생모가 살아있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