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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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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언론사에서 직속상사의 상습 성추행을 신고했다가 기자에서 연구원으로, 그것도 가해자와 같은 층에 위치한 부서로 부당 전보된 피해자다.

용기를 내 회사에 성폭력 피해를 신고했더니, 기자를 못 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저성과자', '무고녀'로 매도당했다. 이후 난 가해자와 회사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사내에는 내가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이후 '성폭력을 당한 순간 바로 신고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것 같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다. 

안 그래도 고단하고 힘든데 성폭력 가해자와 함께 온갖 거짓말로 나를 매도한 이들이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하고 있어 까무러칠 지경이다. 신나게 입방아를 찧어대며 나에게 불리한 사내 여론을 조성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더니,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어서 사과를 할 수가 없단다.

수시로 진술을 번복하는 뻔뻔한 성폭력 가해자만큼이나 나를 지독히 괴롭힌 존재가 바로 가해자의 분신 같은 당신들 '사내 성폭력 피해 감별사'들이었는데 말이다.

이들은 급기야 법원에서 성폭력 피해를 인정한 것이 부당하다는 취지의 의견까지 내면서 근거 없이 내 성폭력 진술이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감별하려 들었다.

지금부터 이 몰상식한 자칭 성폭력 피해 감별사들에게 한소리 하려 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내 의지로 막을 수 없었던 성폭력 피해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어마어마한데 그걸 혀 깨물고 참으며, 일터에서 요구하는 업무의 품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피해를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성폭력 피해자'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다 도저히 더 참다간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생계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서' 용기를 짜내어 피해사실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성폭력 피해를 회사에 알린 피해자들의 상당수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되레 사측, 가해자, 가해자 측근 등에 의해 잔인한 2차 가해에 시달린다.

그럼 경찰에 고소하면 되지 않냐고? 피해자들이 그걸 몰라서 수사기관이 아니라 사내 고충처리기관을 찾아갔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쉽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그 사실이 회사에 소문난다면, 거기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인사고과를 평가하는 상사라면 피해자는 정상적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물론 고소에 들어가는 시간과 소송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충격과 모욕, 변호사 수임료 등의 부담도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다.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이 아닌 사내 기구를 통해 피해를 구제받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시간과 에너지,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현실이 여의치 않아 고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딱 그런 경우였다. 회사의 대응이 너무 몰상식하고 파렴치해 소송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소송을 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건강과 일상을 생각하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에게 선뜻 소송을 하라는 말은 못 할 것 같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누군가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데 피해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도울 용기도 없다면 차라리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라도 하자. 이미 성폭력 피해로 잔뜩 트라우마를 얻은 피해자에게 최소한 '실질적인 가해'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굳이 여기저기 피해자를 의심하고 모욕하는 말을 옮기며 난도질까지 해야겠는가.

태그:#성폭력, #2차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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