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30 18:35최종 업데이트 21.10.30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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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 권우성

 

자전거 네비게이션에 찍힌 경사도와 거리 ⓒ 카카오맵 갈무리

 
오르막은 길고 내리막은 짧았다. '업힐 지옥' 전조일까? 지도만 보고 강원 고성에서 부산까지, 해안선을 따라 내리막길만 달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처음엔 기어를 1단까지 낮추고 악착같이 올라갔지만, 나중에는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젊은 라이더들이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갈 때마다 "난 체력을 비축해야 해"라고 자조했다.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서 정동진까지는 25km. 네비게이션에 표시된 경사도는 1%였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쪽빛 바다를 옆에 끼고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남대천을 건넜다. 남항진쪽은 막다른 길이어서 성덕로를 탔다. 차 한 대만 지날 수 있는 포장된 산길인데 숲과 마을, 들판을 가로지르며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불화산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50대 중후반의 무릎 관절과 근육을 최대치로 올려 고개를 넘었다. 하지만 오르막은 자주 출몰했다. 다른 길인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를 끼워두고 서서 네비게이션을 다시 켰다. 1% 경사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옆에 적힌 '총 상승 338m, 하강 338m'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이 때 알았다.

그 뒤부터 나는 오르막길만 나오면 걸었다. 동해안 종주 라이더의 품격에 금이 가는 일이지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 고난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또 나를 덜어내려고 온 여행이었다. 일상의 무게와 빠른 속도, 거리에 매이지 않고,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까지 덜면서 나홀로 산책하고 싶었다.

다시 해안길로 들어서서 해변에 바짝 붙은 기찻길을 따라 페달을 돌릴 때였다. 바닷가에 우뚝 선 거대한 함정이 나타났다. 쪽빛 바다와 '반공'? 구시대 유물 같았다. 퇴역 함정인 전북함과 북한 잠수정을 전시한 함정전시관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최초 상륙한 곳이고, 1996년 북한잠수함이 침투한 곳이라는 안내판을 읽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정동진] "도로가 온통 숯판이었어요"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 해변. ⓒ 권우성

 
'한양(漢陽)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가 있는 마을'.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은 한산했다. 코로나19 여파다. 지금껏 지나온 수많은 해수욕장, 항구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정동진인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동진역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인적은 없고, 파라솔이 가지런히 접힌 채 장승처럼 모래사장에 줄지어 꽂혀 있었다.

해변 앞쪽 솔밭에 있는 모래시계공원에 가봤다.

"저 구멍을 자세히 보면 아주 미세하게 먼지처럼 떨어져요. 특수 모래라고 합니다."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린 채 거대한 모래시계 앞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나에게 공원 관리 아주머니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1994년 TV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세워진 원통 모양의 모래시계. 지름 8.06m, 폭 3.20m, 무게 40톤, 모래무게 8톤에 달하는 이 모래시계는 세상에서 가장 크단다.

"안 보여요? 난 희미하게 보이는데... 이쪽으로 와서 보면 보일 겁니다."

친절한 그는 "시계 속 모래가 아래로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1년"이라며 "매년 1월 1일 0시에 레일을 이용해서 이쪽으로 반 바퀴를 굴리면 새해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에 설치된 밀레니엄 모래시계. ⓒ 권우성

 
여기까지는 모래시계와 일출로 유명한 정동진의 현재였다. 식당에서 순부두를 먹은 뒤 정동진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다는 사장 최선백씨(69)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동진의 과거였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다 쓰러져가는 촌락이었어요. 집도 거의 없었죠. 여기서 2km 서쪽으로 올라가면 폐탄광이 나옵니다. 60~70년대에는 외지인들이 석탄을 캐려고 몰려들었죠. 도로가 온통 숯판, 새까맸습니다. 지금은 해돋이 인파가 몰려들지만, 정동진역이 생긴 것은 석탄 수송이 목적이었어요."
 

정동진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최선백씨. ⓒ 김병기

 
1980년대말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로 광산이 폐광됐고, 탄광촌 사람들은 정동진을 떠났다. 폐역까지 검토됐던 이곳을 살린 건 드라마 '모래시계' 열풍이었다. 관광객이 몰려들자 코레일은 1997년 정동진 관광열차를 개통했다. 이듬해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검사역을 맡았던 연예인 정보석씨와 김지수씨 신혼여행지가 정동진이었다.

"코로나19로 요즘은 뜸한데요, 연말연초에 저기 해변 모래사장은 북적이는 사람들로 새까맣고, 도로에도 차들이 새까맣게 깔려서 거대한 주차장이 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그 모습, 다시 볼 수 있겠죠."(최선백씨)

정동진의 죽은 경제를 살린 건 문화였다. 석탄 산업을 대체한 건 이야기였다.

[바다부챗길] 천연기념물 제437호, 그 위를 두 바퀴로 달렸다

"나도 여행을 많이 다녀봤는데요, 드라이브 코스로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죠. 거, 있잖아요. 멋진 자동차가 달리는 광고요. 그런 광고들은 죄다 여기서 찍었어요."

정동항에서 나오는 길에 만난 횟집 주인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더니 정동심곡 바다부챗길 자랑부터 늘어놨다. 그는 "이 고개 정상에 매표소에서 1시간동안 걸으면서 부챗길을 감상할 수 있고, 그게 부담스러우면 심곡항 쪽으로 내려가 해안도로를 타면 부챗길 맛을 잠깐 볼 수 있다"고 귀뜸했다.
 

정동심곡 바다부챗길을 달리면 도로로 치고 들어오는 파도와 기암 괴석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김병기

 

정동심곡 바다부챗길에서 본 파도. 구불구불한 도로 양쪽으로 파도와 기암괴석을 감상할 수 있다. ⓒ 김병기

 
그의 설명을 듣고 또다시 고개를 걸어서 넘었다. 해발 180.8m 속동산 고개였다. 네비게이션은 심곡항 입구에서 두 갈래 길을 안내했는데, 횟집 주인의 말을 들었다. 단순 정보만 전달하는 기계보다 입체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의 말을 믿었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자, 그의 말처럼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물결과 웅장한 기암괴석 사이에 난 구불구불한 도로였다. 천연기념물 제437호로 지정된 바다부챗길은 2300만년 전 지각변동이 관찰되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였다.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5분 거리의 짧은 구간을 마치는 게 못내 아쉬워 2번을 더 반복하면서 천연기념물 위를 달렸다.

[약천 시조비] "소는 언제 키울 거야?"
 

강원도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 권우성

 
심곡항에서 묵호항까지는 19.1km. 금진항을 지나 금진해수욕장, 한국여성수련원 솔밭을 지나니 옥계 해수욕장, 도직항을 지나니 도직 해수욕장과 가곡해수욕장. 항구와 해수욕장의 연속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아래쪽,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망상해수욕장도 거의 텅 빈 상태였다.

망상해수욕장의 모래해변에 혼자 앉아 파도를 보며 잠시 멍 때리다가 10여분 거리에 있는 약천사쪽으로 샜다. <오마이뉴스> 역사 전문 시민기자인 김종성씨가 추천한 곳이 심곡약천정보화마을에 있었다. 해변을 뒤로 하고 약천길로 접어들어 농촌 풍경을 지나 한 시비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강원도 동해시 심곡동 약천 남구만 선생 시조비. ⓒ 권우성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지저귄다
소를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났느냐
고개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당쟁이 격렬했던 조선 후기 숙종 때 영의정까지 지냈던 약천(藥泉) 남구만 선생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쓴 시조비이다. 그 앞에 잠시 앉아 있으니, 교과서에 나온 이 시조를 달달 외우게 하면서 시의 주제를 '근면' '성실'이라고만 가르쳤던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하지만 남구만 선생은 평화로운 시어로 당쟁만 일삼으며 권력다툼에 골몰한 세태를 준엄하게 꼬집은 것은 아니었을까? 대선을 앞두고 정책 경쟁은 실종된 채 거친 말싸움만 주고받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시비 옆 우물(약천)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손을 씻으며 한 개그맨의 유행어를 떠올렸다.

"대체, 소는 언제 키울 거야!"

[묵호등대와 논골담길] 쇠락한 달동네 마을 살린 벽화

묵호 등대에 올랐다. 묵호항 인근 오징어잡이 어선과 강원 지역에서 채굴한 무연탄 운송 선박에 불빛을 비추려고 1963년에 설치된 곳이다. 등탑의 높이는 25.9m, 해발 높이가 무려 93m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동해뿐만 아니라 두타산과 청옥산 등 백두대간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등대와 도깨비골 스카이밸리.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등대와 도깨비골 스카이밸리.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도깨비골 스카이밸리.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스카이워크. ⓒ 권우성

스카이밸리에서 바라본 해랑전망대. ⓒ 권우성

 

묵호항 도깨비골 스카이밸리에 설치된 '스카이 사이클'. ⓒ 권우성

   
바로 아래쪽에 조성된 '도째비골(도깨비의 방언) 스카이밸리'는 아찔했다. 입장료 2000원을 내고 들어간 스카이워크 높이는 해발 59m. 까마득한 아래쪽을 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곡과 계곡 사이를 잇는 쇠줄 위에서 서커스를 하듯이 낄낄거리며 자전거(스카이 사이클)를 탔다.

나에게 더 매력적인 곳은 묵호 해변에서 등대로 오르는 가파른 '논골담길'이었다. 항구에서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에 짊어지고 마을길을 오르면, 지게에서 흐르는 물로 흙길이 논길처럼 질척해져서 마를 날이 없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개도 만원짜리를 입에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좁은 골목길을 올랐다. '만복상회' '연탄집' '묵호이용소' '제일선구점'. 입구부터 과거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건물과 감성 벽화가 나왔다. '아버지 혼불의 바다'와 같은 서정시를 적은 현판이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실제 만원짜리를 입에 문 개를 그린 벽화도 있었다.

계단 때문에 자전거를 들고 오르는 구간도 더러 있었지만, 바닷바람을 쐬면서 1941년 개항한 묵호항의 삶의 이야기가 씨줄날줄로 엮인 달동네를 지나니 힘든 것을 잊었다. 30년 전부터 어획량이 줄어 주민들이 떠난 이곳에 활력을 불어넣은 건 이 마을 주민과 예술가들이었단다. 탄광이 폐광된 뒤 쇠락했던 정동진의 모습과 교차됐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묵호등대 아래 등대오름길.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묵호등대 아래 논골담길.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묵호등대 아래 등대오름길.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묵호등대 아래 논골담길. ⓒ 권우성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묵호등대 아래 논골담길. ⓒ 권우성

 
정동진은 드라마가 살렸고, 이곳은 예술인들이 살렸다. 문화는 이처럼 힘이 세다.

묵호항까지의 '업힐 지옥'. 이 구간을 라이딩 반, 산책 반으로 지났다. 방파제에 혼자 앉아서 실컷 바람을 쐰 뒤, 바람을 맞으며 추암 촛대바위로 향했다. 이젠 오르막이 두렵지 않다. 힘들면 걸으면 된다. 속도를 줄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수려한 풍광 속에 숨겨진 삶과 역사가 보인다. 그 속을 걸어온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낯선 이방인도 볼 수 있다.

정동진의 흑역사? "길바닥이 온통 새까맸다" 해안선 1만리 자전거 여행을 떠났다. 첫 행선지는 강원도 고성통일전망대부터 부산 을숙도 생태공원까지. 이 영상은 5편으로 허균·허난설헌 생가부터 묵호항까지 두 바퀴 인문학 여정을 담았다. 이 영상과 관련한 기사한 기사를 보시려면 “정동진 흑역사? “길바닥이 온통 새까맸다” 기사를 클릭하시면 된다.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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