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7 12:13최종 업데이트 21.11.1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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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가 뒤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2021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116주년을 하루 앞둔 11월 16일, <아사히신문>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의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외교관의 진술을 담은 1차 사료다. 사건 가담자가 직접 쓴 역사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성자는 을미사변 당일인 음력으로 고종 32년 8월 20일(양력 1895년 10월 8일) 조선 현지에 주재한 영사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 1895년에 만 30세였던 호리구치 영사관보가 편지를 보낸 곳은 도쿄 서북쪽으로 약 26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인 오늘날의 니가타현 나가오카시다. 이곳에 사는 친구이자 학자인 다케이시 사다마츠(武石貞松)가 수신자이고, 작성일은 사건 발생 다음날이다.
   

본문에 인용된 <아사히신문> 기사. ⓒ 아사히신문


명성황후 죽인 다음날 친구에게 편지

<아사히신문>에 실린 '외교관, 왕비 죽였다고 편지에(外交官 王妃殺したと手紙に)'라는 기사는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상세히 기록했다"며 암살 행동대원인 호리구치가 사전 시나리오대로 경복궁 담장을 넘어 민 왕후(민비, 1897년부터 명성황후로 불림) 처소인 건청궁에 들어가 암살을 실행했다는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그런 뒤 "의외로 쉬워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는 호리구치의 감상도 덧붙인다.


호리구치는 흔히 사무라이로 불리는 무사가 아니라 현직 외교관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행동대원이 되어 대궐 담장을 넘고 왕후 시해에 가담한 뒤, 아직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을 바로 다음날 고향 친구에게 편지를 발송했다. '의외로 쉬웠기에' 바로 다음날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사히신문>은 호리구치의 친구인 다케이시를 "친구이자 한학자"라고 소개했다. 친구 다케이시뿐 아니라 호리구치 본인도 한학에 능통했다. 중국 언어에 능숙한 호리구치의 능력은 을미사변 준비에 적지 않게 활용됐다. 사건 당일 경복궁 담장을 넘는 일뿐 아니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사전 포섭하는 일에도 그 능력이 이용됐다.

세계 최강인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서양열강이 조선 정세와 중국 정세의 연관성에 주목하던 시절이다. 일본의 군사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남의 나라 수도에서 함부로 그런 일을 자행할 수는 없었다.

조선이 급변하면 중국도 영향을 받고 이로 인해 서양열강의 이해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점을 서양 각국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그들을 무시한 채 함부로 조선 정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극악무도한 일을 벌이고자 한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구실을 만들어두는 일이 필요했다.

일본이 호리구치를 대원군 포섭 작전에 투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의 옛 실권자인 대원군이 앞장서는 모양새를 만들어 사변을 일으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종각 동양대학교 교수가 쓴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는 "한학에 능한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를 보내 필담으로 대원군의 의중을 탐지"했다고 설명한다.

문서상의 증거가 남을 수 있는 필담을 하면서 "며느님 죽이시는 데 찬성하시느냐?"고 노골적으로 질문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은유적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이런 필담으로 대원군의 의중을 확인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은, 호리구치가 한문 문장력뿐 아니라 어휘력도 뛰어났으리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문인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붓이 아닌 칼을 들고 경복궁에까지 뛰어들었던 것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인 건청궁. 경복궁 내에 있다. ⓒ 김종성

 
왕성 사변 전말 보고서에 담긴 그날

사변 당일의 정황을 상세히 다룬 문서가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제8권에 수록된 '1895년 10월 8일 왕성(王城) 사변의 전말에 관한 구보(具報)'라는 보고서다. 바로 이 문서에 언급된 '건청궁으로 몰려간 일군(一群)의 일본인들' 중 하나가 호리구치 영사관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이 보고서에 '건청궁으로 몰려간 일본인들'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후궁으로 밀어닥친 일군(一群)의 일본인들은 밖에서 자물쇠를 비틀어 그 안을 엿보니, 여러 명의 궁녀가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야말로 왕비의 거실이구나 생각하고 곧장 칼을 휘두르며 실내로 난입하였다. 궁녀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울고 부르짖으면서 도망쳐 숨으려고 하는 것을 인정상 너그러이 용서할 생각도 있었으나, 모조리 붙잡아 그중 복장이나 용모가 아름다워 왕비라고 생각되는 자는 바로 칼로 죽여 3명이나 되었다.
 
쓰러진 여성들을 살펴보니, 40대 중반 여성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을사늑약으로부터 정확히 54년 전인 1851년 11월 17일 출생한 민 왕후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44세였다. 복장과 용모 등이 우아해서 칼을 휘두르고 보니, 다들 너무 젊어 민 왕후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을미사변의 주력 부대는 일본군과 료닌(낭인)들이었다. 이전에 무사였지만 현직이 없는 료닌들도 이에 가담했다. 그런 료닌 중 하나가 구니토모 시게아키였다. 그 역시 호리구치와 함께 건청궁에 난입했다.

피살된 여성들이 왕후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구니토모는 어느 궁녀의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가슴에 칼날을 들이대면서 왕비의 소재를 캐물었다. 일본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그 궁녀는 공포심에 휩싸여 그저 울면서 애걸복걸할 뿐이었다. 살려달라는 그 궁녀의 애원은 한국어를 알든 모르든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호리구치가 위 보고서에 등장한다.
 
옆에 와 있던 호리구치가 구니토모에게 이런 잔학한 행동을 행하지 말라고 제지했지만 결코 들어줄 것 같지 않자, 오기와라의 질책으로 비로소 그 폭행을 중지하였다.
 
영사관에서 보안 업무를 담당하는 오기와라 히데지로 경부(警部)의 제지를 받은 뒤에야 구니토모가 궁녀의 머리채를 놓아줬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호리구치·구니토모·오기와라 등은 계속해서 민 왕후를 수색했다. 그 결과는 이렇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인 난입자는 곳곳에서 왕비의 소재를 수색 중, 어떤 궁녀 말에 의하여 왕비는 볼의 위쪽에 한 점의 벗겨진 자욱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미 살해된 부인의 시신을 점검하였다.

그중 1명은 과연 볼 위 즉 속칭 관자놀이라고 칭하는 부분에 벗겨진 자욱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으므로, 이를 다른 궁녀 여러 명에게 보였더니 누구나 다 왕비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 후에 이것을 대원군에 고하였더니 그도 역시 틀림없이 그가 왕비임을 믿고 손을 치며 매우 만족한 뜻을 나타냈다.
 
어린 고종을 옹립하고 실권을 행사하던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처가인 민씨 가문을 앞세워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내자, 아들 대신 며느리 쪽에 분노를 표출하며 살았다. 일본군을 이끌고 경복궁까지 간 것도 모자라 며느리의 피살을 확인하고 손뼉을 치는 대원군의 모습은 1873년 실각 이후로 축적된 그런 분노의 표현이었다. 그런 분노가 담긴 손뼉 치는 모습을 일본인들 앞에서 서슴없이 보여줬던 것이다.
 

경기도 여주군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초상화. ⓒ 김종성

 
1895년 10월 8일의 시해 현장을 휩쓸었던 호리구치 등은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해한 여성들 중 하나가 민 왕후였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됐다. 너무 젊어 40대 중반의 왕후로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 중 하나가 바로 명성황후였던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호리구치 구마이치의 서신은 을미사변 현장에서 시해에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범행 다음날 고향 친구에게 살해 당시의 감상을 전한 글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띤다. 을미사변의 보다 구체적 정황과 더불어 시해 가담자들의 심리 세계를 세밀히 보여줄 만한 자료다. '의외로 쉬웠다'며 이웃나라 왕후를 죽일 수 있는 대담한 나라, 일본제국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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