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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씨.
▲ 고등학생 시민군 "오월의 사진가" 김향득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활동한 김향득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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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1980년 5월 '살아남은' 이후로 내내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고교생 시민군은 학살자 전두환의 죽음 앞에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떠올렸다. 사과 한 마디 없이 죽은 학살자의 추악한 모습 또한 '살아남은 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3이었던 김향득씨의 이야기다.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 계엄군의 진압 때 붙잡힌 김씨는 악명 높았던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2개월 넘게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잡혔던 그날 어찌나 덥던지 게버끔(거품)을 물 정도로 고문을 당했고 온 몸은 피범벅이 돼 있었다."

체중이 35kg까지 줄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던 김씨는 2007년 옛 전남도청 원형 훼손 논란이 불거졌을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5.18 관련 현장과 피해자, 유족들을 사진에 담아온 그는 '5월 사진가'로 불린다.

김씨는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접했던 지난 23일을 떠올리며 "착잡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죄라도 하고 죽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건데 (그렇지 않은 모습에) 기분이 착잡했다"라며 "원래 태생부터 (전두환은) 그런 사람인가 보다. 역사에 큰 죄를 짓고 간 것"이라고 한탄했다.

"전두환 죽음, 사회 곳곳의 민낯 드러나"
 
전두환씨가 12.12 및 5.18 첫 공판이 열리는 1996년 3월 11일 안양교도소를 떠나 서울지법에 도착해 호송차에서 내려 구치감으로 들어서고 있다.
 전두환씨가 12.12 및 5.18 첫 공판이 열리는 1996년 3월 11일 안양교도소를 떠나 서울지법에 도착해 호송차에서 내려 구치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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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씨는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전두환에게 조의를 표하는 모습에 "애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범법자, 특히 그렇게 죄 많은 사람에게 조문을 가거나, 조화를 보내는 건 온당치 않은 행동"이라며 "전두환의 죽음으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선 안 된다. 역사인식의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전두환을 '전(前) 대통령'으로 칭하거나 그의 죽음을 '별세', '서거' 등으로 표현한 언론을 향해서도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호칭도 달라지는 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며 "전두환의 죽음으로 우리 사회 곳곳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전두환이 죽고 나서 "함께 행동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이 생각났다"라고 말했다. 특히 "역사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해 살아남은 자로서 그저 미안하다"라며 "전두환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5.18을 왜곡하는 이들은 많고 그의 빈소 앞 역시 5.18을 왜곡하는 이들로 넘쳐났다"라며 "5.18 진상규명과 왜곡에 대한 대응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그:#전두환, #5.18민주화운동, #김향득, #시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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