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5 11:10최종 업데이트 21.12.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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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마을의 크리스마스 잔치. 음식과 술과 음악과 춤이 빠질 수 없다. 이날은 어른들도 그리고 아이들도 그들이 가진 옷 중 가장 화려한 전통옷을 입는다. 멕시코의 가톨릭은 원주민 전통신앙과 결합된 부분이 많다. 따라서 각 마을마다 가톨릭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서로 다른 토속 신앙이 곁들여져 다양한 형태의 크리스마스 연회가 베풀어진다. ⓒ 림수진

 
'크리스마스 냄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외국인이라기보다 차라리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야흐로 어느 해 11월 중순이었으니,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 냄새도 아닐 것이요 혹은 크리스마스 즈음의 독특한 풍습이나 자연환경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있는 곳은 크리스마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겨울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12월이 되어도 낮으론 영상 섭씨 30도를 훌쩍 넘기는 곳이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냄새라니. 오감 아니라 육감까지 동원해보아도 도무지 상상키 어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12월이 되면 사람들은 연일 크리스마스 냄새 타령에 더해 '크리스마스가 바로 저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즈음엔 덩달아 나도 콧구멍을 최대한 확장해 보고,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도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는 모퉁이 어디쯤을 두리번거렸다. 습자지보다도 더 얇은 내 팔랑귀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크리스마스 냄새, 포사다

멕시코에서 크리스마스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왜 이들은 한 달 전부터 크리스마스 냄새를 맡고 금방이라도 크리스마스가 짠! 하고 나타날 것 같은 모퉁이를 향해 목을 빼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일까? 12월 25일, 오직 그 하루를 위해 한 해의 수고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그들에 대한 이해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그런데 십수 년을 살다보니 나 역시 12월이 되기도 전에 크리스마스 냄새를 맡고 저 모퉁이 어디쯤에서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짜릿짜릿하고 둥실둥실한 설렘을 가지고 말이다.


통상적으로 멕시코에서 길고 긴 크리스마스 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건물과 거리 곳곳에 내걸리는 빛 장식이다. 물론 크리스마스트리도 빠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50% 이상의 직원이 재택근무를 하는 내 직장에서도 지난 11월 중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식이 있었다. 하루 종일 트리를 준비하던 동료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트리 설치가 늦어졌다고 툴툴거렸다.

12월이 되면 업무 중간 중간에 크리스마스 관련 행사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멕시코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포사다(POSADA)라고 불리는 연회가 마을 단위 혹은 직장 단위로 조직된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직원이 약 3500명 정도 되는데 12월 초부터 포사다가 각 부서별 조직별로 열리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연회들이 반드시 업무 시간 안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몸은 하나지만, 연회는 조직별, 부서별, 직군별, 혹은 성별로 소집되기 때문에 1인당 최소 서너 번 이상 서로 다른 연회에 초대를 받는다. 그러니 12월이 되면 업무에 공백이 생기는 일이 다반사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바야흐로 12월인데...'라는 분위기를 타고 실로 아무 일 아닌 듯 흘러간다. 
 

멕시코 성탄절을 위한 포사다(POSADA)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피냐타(Pinata)라고 불리는 조형물이다. 옛날에는 깨지기 쉬운 진흙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골판지를 이용해 만든다. 구조가 갖춰지면 그 위에 화려한 색종이 수술을 달아 장식한다. 가장 기본 구조는 7개의 뿔이 달린 형태인데, 각각의 뿔이 서로 다른 죄악을 상징한다. 포사다 행사가 무르익을 즈음 마을 사람들은 이 피냐타를 허공에 달아 둔 채 각자 눈을 가리고 긴 막대기로 때려 부수는 형태의 놀이를 하면서 포사다의 클라이맥스를 즐긴다. 진흙이나 골판지로 만든 피냐타가 깨지면서 그 안에 담아 뒀던 사탕과 과자가 쏟아지는데, 멕시코 사람들은 이를 신의 은총이 깃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여긴다. ⓒ AFP 뉴스 화면

 
각각의 연회에서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음식과 선물이 제공되지만 아직도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기분에 취하긴 좀 이른 감이 있다. 사실, 12월 내내 이어지는 연회들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풀코스 요리에 비유한다면, 입맛을 돋우는 전체 요리 정도에 해당하겠다. 다양한 전체 요리를 먹으며 본요리에 어떤 메뉴가 나올까 쫄깃한 설렘으로 상상하는 맛은 유쾌하다.

법이 정한 크리스마스 보너스

본요리는 단연 '아기날도(aguinaldo)'라 불리는 상여금이다. 스페인어로 '선물'을 뜻하기도 하는데, 고용주 맘에 따라 주고 안주는 것이 아니라 법이 정한 크리스마스 보너스이다. 최소한 기본급의 15일 분을, 아무리 늦어도 12월 20일까지는 지급해야 한다. 이쯤 되면 각 신문의 지면에도 '고용주가 아기날도를 주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은 '나의 아기날도는 어떻게 계산해야 하나요?' 등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그러니 매년 12월이 되면 오직 관심은 상여금에 집중된다. 어디서든 대화의 주제는 '아기날도'다. 언제 나올지, 얼마나 나올지를 두고 연회에 모인 동료들 간에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행복한 토론이 아닐 수 없다.
 

크리스마스 잔치가 있는 날이면 멀리 떨어져 지내던 이웃들도 마을 장터나 광장에 가장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모여든다. 대중교통 수단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 짐트럭에 빼곡히 실려온다. ⓒ 림수진

 
통상적으로 아기날도 액수는 연초 노사 간 임금 협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현안이다. 최소 기본급의 15일분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최대치는 정해진 바가 없다. 오직 노사협의 과정에서 사측과 노동자 측의 팽팽한 긴장 속 의견 조율을 통해 나오기 때문에 매년마다 며칠 분이 나올 것인지에 대해 노동자들은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내가 속한 직장의 경우 올해 아기날도로 기본급의 62일분이 정해졌다.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그러나 이곳 멕시코에서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석유공사, 전기국, 전화국 같은 곳은 60일분에 온갖 명목의 보너스가 더해진다는 설이 있으니, 목을 빼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관공서들이 지난 12월 15일 가장 먼저 아기날도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크고 작은 회사들도 따라 아기날도를 지급했다. 작은 소읍, 우리마을에도 돈이 도는 것은 당연할 터. 인구 2만도 채 되지 않는 마을에 몇 날 며칠째 장이 선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새벽일을 나가는 농부들인지라, 저녁 아홉시만 되어도 깊은 밤에 드는 마을 광장에 늦은 밤까지 인파가 몰린다. 많든 적든 아기날도가 바닥이 날 때까지 사고 또 살 것이다. ⓒ 림수진

 
노동자들만큼이나 아기날도 지급을 노심초사 기다리는 이들은 지역 소상공인들이다. 주정부나 주립대학교 같이 수천 명 이상 노동자가 근무하는 곳에서 아기날도를 지급해야만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대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게들은 진열대에 물건들을 쌓아 쟁이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그 물건들을 사 쟁인다. 있는 돈은 한시라도 빨리 써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이 다분한 민족이니, 크리스마스 상여금으로 나온 돈은 온전히 이때를 위해 써야 한다는 일념이 투철하지 않을 리 없다. 사들이는 물건 대부분은 6촌 혹은 8촌까지 포함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이다.
 

멕시코 시골에서의 삶이 결코 풍요롭거나 여유롭지 않지만,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오면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새옷을 준비해준다. ⓒ 림수진

 
오늘 날, 우리나라를 포함 많은 나라들에서 예전과 같은 크리스마스 흥이 사라졌다지만, 멕시코에서는 여전히 가족이 모여야 하고 선물을 나눠야 하고 밤을 새워 음식을 나누며 친목을 즐겨야 하는 날이다. 모 언론에서 '크리스마스와 가장 가까운 단어'를 시민들에게 물었을 때, 60%가 가족이라는 말로 답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명절증후군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달을 훌쩍 넘기는 크리스마스 절기의 절정은 당연히 이브에 해당하는 12월 24일 밤이다. 곳곳에서 가족들이 모인다. 우리나라에 통금이 있던 시절 단 하루 통금 해제를 틈타 밤을 꼴딱 새우던 올나이트처럼 이곳에서 크리스마스이브란 무조건 가족과 함께 밤을 새우는 날이다. 아이들이라고 예외는 없다. 밤새 폭죽을 쏘아 올리며 논다. 산타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드는 여느 나라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르다. 멕시코의 아이들은 그 누구도 산타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밤새 논다 한들 크게 손해 날 것이 없다. 심지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도 제법 많다.
 

멕시코 우체국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중앙우체국에 별도의 우편함을 만들고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동방박사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싶은 선물을 아뢰는 편지보내기 행사를 진행한다. 위 사진은 멕시코 중앙우체국에 설치된 동방박사들 이미지. ⓒ Notimex 화면캡처

 
멕시코에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사람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동방박사들이다. 예수의 탄생을 감지하고 먼 길을 걸어 베들레헴까지 유황과 몰약과 황금을 가져온 이들이 오늘날까지도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온 세상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그 날은 가톨릭 절기상 주현절에 해당하는 1월 6일이다. 그러니 12월 24일은 맘 놓고 밤을 새워 놀 수 있는 것이다.

멕시코의 모든 공공기관과 수많은 기업들은 이미 지난 12월 17일에 종무식을 마쳤다. 휴가는 1월 6일까지 이어진다. 그 이전에 직원들에게 풍요로운 크리스마스 연회를 베풀었음은 물론일 것이고, 또한 상여금도 지급했을 것이다. 게다가 매달 15일과 30일, 두 번에 걸쳐 보름 급을 받는 대부분 노동자들은 2021년 마지막 보름급인 12월 30일 급여까지 당겨 받았을 것이다. 12월 30일이라면, 급여를 지급하는 직원도, 그리고 급여를 수령하는 직원도 출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어린이들은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오는 이는 세 명의 동방박사라고 믿는다. 별을 보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감지한 후 먼 길을 걸어 베들레헴까지 몰약과 유황과 황금을 가져다준 것처럼 이들에게도 선물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다. 다만 동방으로부터 먼 길을 걸어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 1월 6일에 도착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성탄절을 보내고 1월 6일이 되기까지 멕시코 거리 곳곳에는 동방박사 분장을 한 이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들의 이름은 Melchor, Gaspar, Baltasar다. 멕시코에서는 1월 6일이 되어야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절기가 막을 내린다. ⓒ UNIVISION 뉴스화면

 
오미크론 와중에, 이들이 이러는 이유

관공서와 기업과 학교가 20여 일 정도의 긴 크리스마스 휴가에 들어간 이후, 각 마을마다 골목골목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다. 직장인들이야 어쩔 수 없이 종무식을 하기 전인 12월 17일 이전에 크리스마스 잔치를 벌였겠지만, 멕시코 가톨릭 교회력으로는 12월 16일부터 24일까지가 공식 포사다 기간이다. 마을마다 교회를 중심으로 옆마을과 서로 날짜를 달리하여 잔치를 벌이는 중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어릴 적 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크리스마스에는 언제나 마을 포사다가 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즈음 다 같이 모여 솥을 걸고 음식을 해 나누고 아이들에게는 귀한 사탕 몇 알이 선물로 돌아가던 시절의 추억이다.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의 잔치가 온전히 가족들 간의 것이라면 포사다는 이웃과 친구들이 어우러지는 잔치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아흐레 동안 마을 이곳저곳에서 잔치가 벌어진다. 대도시에서야 마을 포사다가 거의 사라졌지만, 작은 소읍들에서는 여전히 마을마다 크리스마스 잔치가 열리는 즈음이다. 물론, 먹을 것이 흔해 사탕 몇 알로 예전과 같은 행복을 느끼진 못하겠지만,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면서 마을마다 열심히 흥겨움을 더하고 있는 중이다.
 

멕시코에서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중요한 것이 '탄생Nacimiento'이라 불리는 장식이다. 대부분 집집마다 자기 집에서 가장 아늑한 곳에 교회력으로 포사다가 시작되는 12월 16일 즈음 '탄생' 장식을 한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둘러싸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구유에 살던 동물들이 경배하는 장면이 각종 장식과 함께 표현된다. ⓒ 림수진


오미크론 변이 발견으로 4차 대유행이 임박했다는 뉴스가 연일 이어지지만 크리스마스 앞에선 별 힘을 못쓰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들의 흥겨움이 여느 나라 기준에서 본다면 분명 위험천만할 것이다. 어쩌면 욕이 저절로 튀어나올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이 못해주는 것을 국가가 해주는 나라가 있는 반면, 국가가 못해주는 것을 가족과 이웃이 해주는 나라도 있음을 감안한다면, 지금 이곳 멕시코 사람들의 이 지독한 가족애는 어쩌면 이 시기를 살아내기 위한 그들 나름의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역병의 와중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우울한 시절이지만, 그들 특유의 유쾌함으로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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