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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역 플랫폼에서 마산행 열차를 기다리는 여정수의 마음은 담담했다. 사과장사를 해서 재기를 노리렸지만 빈털터리가 되어 특별한 계획도 없이 마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적소리를 내며 도착한 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삼랑진을 거쳐 마산에서 내렸다.

그런데 초저녁답지 않게 마산 하늘이 컴컴했다. 바람도 불었다. '날씨가 왜 이렇지, 비가 오려나?'라며 여정수는 여인숙을 찾았다. 마산에서의 첫날밤, 그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강력한 태풍 '사라'호가 마산에 상륙했다. 사이판섬의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제14호 태풍 '사라'는 제주도와 영남을 비롯한 전국에 물폭탄을 뿌려댔다. 태풍 사라는 사망 및 실종 849명, 이재민 37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낳았는데, 여정수가 묵은 여인숙 지붕도 날아갔다. 1959년 9월 15일의 일이었다.

다음날 마산 시내를 걷던 그는 엿장수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 저도 그 일 좀 할 수 없습니까?" 말 없이 아래위로 쳐다보던 노인은 여정수에게 "따라 오시우"라고 했다. 노인을 따라 고물상에 간 그는 엿장수 지게를 받았다. 그가 할당받은 구역은 시내가 아니라 산비탈이어서 리어카로는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3.15 부정선거 규탄... 그리고 부상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창원마산에 있는 3.15의거 기념탑.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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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수가 엿장사를 한 지 6개월 됐을 때였다. "으쌰 으쌰!" "저게 뭔 소리랴?" "부정투표는 무효다!" "민주주의를 사수하자!"라는 구호가 거세어졌다. 엿도가(都家)에서 하숙하던 여정수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정수야, 여기 앉아라!" 도가집 안주인이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 나가면 죽어!" "소변 좀 보고 올게요." 여정수는 화장실 가는 척하다가 길거리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저녁 7시경 마산 시내는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날 치러진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의 부정투표에 분노한 이들이었다. 당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려 전무후무한 부정 투·개표 행위를 저질렀다. 이른바 3명이 투표소에 같이 들어가 자신이 찍은 투표용지를 조장에게 보여주는 '3인조 선거'를 비롯 개표 과정에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기도 했다. 

3월 15일 오후부터 마산에서는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시작됐고 엿장수 여정수도 동참했다. 마산시 자산동 굴다리 위 기찻길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까마귀처럼 몰려들었다. 여학생들은 치마에 철길에 있는 자갈을 담아 날랐고, 남학생들은 경찰들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시위대가 마산시청 정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끼익" 급정거한 지프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몽둥이찜질을 했다. 여정수는 골목으로 무작정 뛰었다. "부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지프차가 골목까지 쫓아왔다. 지프차는 그를 향해 돌진했고 "퉁"하는 소리와 함께 여정수는 도랑으로 날아 떨어졌다.

"저 새끼 살았는대요." "(바다에) 집어 넣읍시다." 의식이 가물거리던 여정수는 "수장시키자"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읔. 살려 주세요" 경찰 간부는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을 바다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며 여정수를 입원시켰다.

도립병원에 입원한 그는 전신마취를 하고 팔, 다리, 머리 수술을 했다. 깁스를 하고 있는 그를 마산검찰청에서는 중대 범죄자로 옭아매려고 했다. 그는 마산이 고향도 아닌 외지인이었고 몽양 여운형 집안이었기에 '빨갱이'로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다행히도 도립병원장은 중환자 여정수를 검찰에 내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물러가고 1년 후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원호처(국가보훈처의 전신)를 설립해 4월 혁명의 사망자 및 부상자들을 원호대상자(국가유공자의 전신)로 선정했다. "월 2,250원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C급 원호대상자 지정과 연금을 단호히 거부하는 여정수 앞에서 원호처 직원은 얼굴이 빨개졌다. 1961년 당시 5급 공무원 월급이 2500원이었다. 4.19 혁명의 성과를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군사 정권을 인정할 수는 없어 여정수는 원호대상을 거부했다.

이후 여정수는 고향인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금사면 전북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여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그에게 "떠나라"고 했다. 이후 여정수는 기차를 타고 강원도 태백군(현 태백시) 철암역에 도착했다. 당시 철암~황지 간 산업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됐다. 3개월 정도 일했을 때 함바 주인이 "성운이 떠나야겠어"라고 했다. 성운은 여정수의 가명이었다. 여정수가 이유를 묻자, 함바 주인은 난처한 듯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철암을 떠나 황지 탄광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탄광에서는 좁은 굴에 통발(굴 붕괴를 막기 위해 세우는 받침목)을 들고 가기에 적합한 덩치가 작은 사람이 필요했다. 체구가 작은 여정수가 제격이었다. 그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경찰의 신원조회와 감시는 여기에도 미쳤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4월 혁명 참가자 일부를 대상으로 신원조회를 통한 감시를 일삼았는데 여정수도 그 사례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목숨 잃은 엄마와 여동생

'펑'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자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말 그대로 개미가 움직이는 것도 보일 정도였다. "쾅쾅쾅" "타타탕" 미군의 대포와 기관총, 소총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조명탄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 이번에는 "깨개개갱" "삐리리리" 중공군의 꽹과리와 나팔 소리가 미군의 혼을 빼앗았다.

미군과 중공군의 일진일퇴로 경기 여주군 금사면 전북리의 겨울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아침 해가 뜨자 눈 속에 파묻힌 중공군 시신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주민들은 시신을 수습해 야산에 매장했다. 마을이 전장터로 변하자 주민들은 피난길에 나섰다. 피난길 준비를 하던 윤금례(당시 29세)가 뒤주에서 쌀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슈~웅 쾅"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그녀 앞에서 터졌다. 쌀바가지가 깨지면서 쌀이 사방으로 튀고 그녀는 마루에 고꾸라졌다. 등에 업힌 6개월 된 아기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갖고 나오던 아들 여정수(1939년생)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 여병기는 제2국민병(국민방위군)으로 집에 없었다. 아내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여병기가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쌀독이 바닥나 열흘 동안 굶은 여병기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두 달만 있으면 햅쌀이 나오지만 결국 마을 지주에게 '장리(長利)' 쌀을 빌리기로 했다. 장리쌀은 보통 이자가 5할(50%)이었다. 즉 봄에 5말을 빌리면 가을에 7말 반을 갚아야 했다. 여병기가 장리쌀 5말을 빌려와 피눈물을 흘린 다음 날 새벽, 아들 여정수는 집을 뛰쳐나왔다. 1954년 7월, 소년의 집 나이 16세 때였다.

열여섯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식당 서빙, 지게꾼, 아이스케키 장수 등을 전전했다. 이후 제과업, 딸기잼 장사도 했지만 모두 망하고, 빈털터리로 마산행 기차를 탔다. 마산에서 4.19 혁명을 겪은 그는 우여곡절 끝 귀향해 농촌지도자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옷장사로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는데, 1980년대부터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지가 되었다. 그는 88 서울올림픽 준비위원으로 선임돼 1964년 하계올림픽 개최지였던 일본 도쿄를 선진지 견학차 방문했다.

방문 중 히로시마 원폭돔을 가게 된 그는 문화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역사이든 피해의 역사이든 건축과 문화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게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국내의 철거되는 건축과 문화재를 사들여 보존했다. 1975년부터 관악캠퍼스로 이전된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 중 일부를 포함, 이기붕 서울시장·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자택 및 별장 건물, 삼풍백화점 정문에 있던 건축물 등이 그것이다. 1500평의 자택에 1000여 점의 문화재를 소유한 그는 진정한 문화인이다.
 
국가유공자 증서를 들고 있는 증언자 여정수
 국가유공자 증서를 들고 있는 증언자 여정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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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엿장수, #4월 혁명, #미군 폭격, #사라호,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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